2013. 1. 17. 21:52ㆍ책읽기와 책쓰기/북리뷰
나는 이렇게 책을 읽는다. 먼저 머릿말과 맺음말부터 읽어본다. 그리고 어떤 내용을 전달하려는지 상상해본다. 상상력의 결과가 재미지다면 기꺼이 읽어준다. 맥스루카도의 예수님처럼도 마찬가지다. 그의 맺음말은 그 어떤 책보다도 그가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을 잘 응축해내고 있다. 조금은 길지만, 내용이 워낙 알차기에 이전에 필사했던 부분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
맺음말
예수를 바라보자
- 맥스 루카도
보일 때가 있고 볼 때가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옆집 보트에 “배 팝니다”라고 써붙인 종이를 보는 그 아침, 모든 것이 달라진다. 고급 목재 보트. 당신이 3년 동안 갖고 싶었던 보트. 갑자기 다른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 인력에 끌려 당신의 차가 그 곁으로 다가간다. 당신의 꿈이 햇살에 빛나는 것을 보며 당신은 나직이 탄성을 발한다. 선체를 더듬던 손가락이 옷으로 흘러내린 군침을 닦느라 잠시 멎는다. 보고만 있어도 당신은 이미 타마프완테 호수에 가 있다. 당신과 은빛 바다, 그리고 당신의 목재 보트뿐이다.
어쩌면 당신에게는 다음 사연이 더 잘 맞을지 모르리라.
그 남학생이 영문학 과목 교실로 들어서는 것을 보는 그날, 모든 것이 달라진다. 매력이 풍기는 당당한 걸음. 귀티가 나는 깔끔한 인상. 너무 빨라 불안한 걸음도 아니고 너무 느려 오만한 걸음도 아니다. 전에도 그를 본 일이 있으나 오직 꿈속에서였다. 그런 그가 지금 실체가 되어 눈앞에 있다. 당신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수업이 끝날 즈음에는 곱슬머리 머리칼과 속눈썹 하나까지 이미 다 외워진다. 하루가 저물 무렵에는 그가 당신의 사람이 되리라는 것이 이미 마음에 굳어진다.
보일 때가 있고 볼 때가 있다. 스칠 때가 있고 외울 때가 있다. 지나갈 때가 있고 연구할 때가 있다. 우리는 새 보트나 새 남학생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대부분 알고 있다…하지만 예수님을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예수를 바라보는”(히12:2)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는가?
지금까지 열두 장에 걸쳐 우리는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았다. 그렇게 순결한 마음, 그렇게 흠 없는 성품을 세상은 결코 본 일이 없다. 그분의 영적 청각은 아주 민감하여 하늘의 속삼임을 놓치신 일이 없다. 그분의 자비는 한없이 풍부하여 용서의 기회를 그냥 보내신 일이 없다. 그 입술에서는 거짓말이 나간 일이 없고, 그 어떤 방해거리도 그분의 시선을 흐리고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뒷걸음질칠 때 그분은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다른 사람들이 포기할 때 그분은 견디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궁극적 모본이시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가 보인 반응, 그것이 바로 남은 인생 동안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에게 예수님을 바라보라 명하신다. 천국은 당신의 심안을 구주의 마음에 고정시켜 그분을 당신의 삶의 목표라 삼으라 하신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함께 해온 시간을 이 질문으로 마감하려 한다. 예수를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목자들이 말해 줄 수 있다. 그들은 천사들을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만으로 족할 수도 있었다. 밤하늘에 찬란한 빛이 비취었다. 정적을 뚫고 합창이 울려 퍼졌다. 시골뜨기 목자들은 천사들의 합창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벌떡 일어났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생전 구경해 본 적 없는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천사들을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 목자들은 그 천사들을 보내신 분을 보기 원했다. 그분을 보기 전에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예수를 찾은 자들의 긴 행렬을 추적해 올라가면 거기 이렇게 말한 한 목자를 발견하게 된다. "가서…보자"(눅2:15)
목자들 뒤쪽으로 행렬이 조금만 지나면 거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다. 누가는 시므온이 그리스도 출생 시기에 성전에서 섬기던 의로운 사람이라 말하고 있다. 누가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6절). 이 예언은 목자들이 예수님을 본지 며칠 만에 과연 성취되었다. 시므온은 마리아의 팔에 안긴 홑이불 속의 아기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므온은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족했다.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기 원한다. 시므온의 꿈은 그렇게 좁지 않았다. 세상을 지으신 분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기 원했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보아야만 했다.
그는 기도했다. "주재여, 이제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29-30절).
동방박사들도 똑같은 열망이 있었다. 시므온처럼 그들도 예수님을 보기 원했다. 목자들처럼 그들도 밤하늘에서 본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별이 웅장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요 역사적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불타는 행성의 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특권이었다. 그러나 박사들은 그것만으로 족하지 않았다. 베들레헴 상공의 별을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 베들레헴의 별이신 그분을 보아야 했다. 그들이 보러 온 것은 바로 그분이었다.
그들은 뜻을 이루었다. 모두 뜻을 이루었다. 이들의 부지런함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뜻을 저버리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이었다. 예쑤님은 그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보이기 원하셨다! 목장에서 왔든 왕궁에서 왔든, 성전에서 살았든 양떼 중에서 살았든, 예물이 황금이었든 꾸밈없는 놀람의 표정이었든… 그들을 다 환영받았다. 아기 예수를 보기 원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한 사람을 하나라도 찾아보라. 아무도 없다.
그분을 찾지 않은 사람들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헤롯 왕처럼 낮은 차원의 것에 만족한 이들. 종교 지도자들처럼 그분을 보기보다는 그분에 대해 읽는 것을 더 좋아했던 이들. 그분을 찾지 않는 사람들과 그분을 찾은 사람들의 비율은 수천 대 일이다. 그러나 그분을 찾은 사람들과 그분을 만난 사람들의 비율은 1:1이다. 찾은 사람은 누구나 만났다.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히11:6)시라는 약속이 기록되기 이미 오래 전부터 입증된 셈이다.
예는 계속된다. 요한과 안드레를 생각해 보라. 이들도 보상을 받았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말을 듣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전도자의 측근에서 그를 받드는 것으로 족했을 수도 있다. 더 훌륭한 스승이 있을 수 있을까? 딱 한 분 있었다. 그분을 보던 날 요한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좇았다. 이들의 질문을 주목해 보라.
이들은 물었다.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요1:38). 아주 당돌한 물음이다.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 한 것도 아니고 의견이나 메시지나 기적을 청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분의 주소를 물었다. 그분과 같이 있기 원했다. 그분을 알기 원했다. 그분의 고개를 돌리게 하는 것과 그분의 마음을 불타게 하는 것과 그분의 영혼에 열망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했다. 그분의 눈빛을 배우고 그분의 발걸음을 좇기 원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기 원했다. 그분을 웃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분도 피곤해질 때가 있는지 알기 원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알고 싶었다. 예수님이 요한이 말한 바로 그분일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것일까? 친척과 얘기해서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예수님 자신과 얘기해야 한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은 대답은? "와 보라"(39절). 그분은 "와서 흘끗 들여다보라"거나 "와서 살짝 엿보라"고 하시지 않았다. "와 보라"고 말씀하셨다. 이중 초점 안경과 쌍안경을 가지고 오라. 지금은 곁눈질이나 띄엄띄엄 엿보기를 할 때가 아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어부는 보트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제자들은 구주를 바라보았다.
마태도 그랬다. 알다시피 마태는 직장에서 일하다 회심했다.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세무공무원이었다. 이웃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사기꾼이었다. 그는 길모퉁이에 납세 지소를 차려 놓고 손을 벌리고 있었다. 예수님을 보던 날도 그는 거기 있었다. "나를 좇으라." 주님의 말씀에 마태는 그대로 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우리는 마태의 집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마9:10).
마태는 길목에서의 회심으로 만족할 수 없어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다. 사무실 책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저녁식사 자리에서 일어난다. 넥타이를 벗고 고기를 굽고 음료수를 따르라. 하늘에 별들을 매단 분과 저녁을 함께하라. "저, 예수님. 이런 걸 여쭈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항상 알고 싶었던 것이…."
이번에도 역시 초청이 아름다우나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초청의 수락이다. 마태가 사기꾼이었다는 것도 예수님께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태가 착취수입으로 호화주택을 지었다는 것도 예수님께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마태가 예수님을 알기 원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시기에 마태는 자기 집에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로 그 상을 얻었다.
그래도 마태나 되니까 예수님이 시간을 내셨겠지. 어쨋거나 마태는 주전을 뽑혀 특별 격려를 받아가며 신약의 첫 책을 쓴 자가 아닌가. 예수님은 마태나 안드레나 요한 같은 큰 사람들만 상대하시는 거야. 과연 그럴까?
한 실례 인물로 그런 생각을 반박해도 좋을까? 삭개오는 큰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작았다. 얼마다 작았던지 예수께서 여리고에 오시던 날 길거리에 늘어선 무리 너머로 그분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무리는 그가 팔꿈치로 길을 열어 앞쪽으로 나가게 해줄 수도 있었다. 한 가지 문제는 그 역시 마태처럼 세리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역시 마태처럼 예수님을 보고 싶은 갈급한 마음이 있었다.
그는 무리의 뒷전에 서 있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 종이 망원경으로 실눈 뜨고 보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 메시아의 행렬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것으로 족하지 않았다. 삭개오는 자기 눈으로 직접 예수님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극한 악조건도 마다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스리피스 고급 정장에 이탈리아제 새 구두를 신은 채 오직 그리스도를 보리라는 희망으로 나무에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당신이라면 기꺼이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이라면 그 모든 악조건 속에서 예수님을 보러 나가겠는가?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삭개오가 나뭇가지 사이를 기어가는 장면이 나오는 바로 그 성경에서 우리는 또한 부자청년을 만난다. 삭개오의 경우와 달리 무리는 그게에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젊은 관원에…에헴…부자가 아니던가. 예수님이 그 지역에 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리무진을 불러 타고 마을을 가로질러 목수를 찾아왔다. 그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을 자세히 보라.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19:16).
이 관원을 보니 단도직입적인 사나이다. 형식적인 인사나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을 시간이 없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당신도 바쁘고 나도 바쁜 사람이오. 구원받는 길만 말해 주시오. 그리고 끝냅시다."
그의 질문은 잘못된 것이 없으나 그의 마음은 문제가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과 다른 이들이 원하는 것을 비교해 보라.
· 삭개오. "저 나무에 올라갈 수 있을까?"
· 요한과 안드레. "어디 계시오니이까?"
· 시므온. "그분을 뵐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을까?
· 박사들. "나귀 안장을 지우세. 그분을 뵐 때까지는 멈출 수 없네."
· 목자들. "가서 보자."
차이를 알겠는가? 부자청년은 약을 원했다. 다른 이들은 의사를 원했다. 관원은 퀴즈의 답을 원했다. 그들은 스승을 원했다. 그는 급했다. 그들의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차에 탄 채 주문하는 커피 한잔으로 족했다. 그들은 여회석상의 풀코스 식사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은 구원 이상의 것을 원했다. 구주를 원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기 원했다.
그들은 간절히 찾았다. 어떤 번역에는 히브리서 11:6이 이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NIV)
이런 번역도 있다. "하나님은 자기를 구하는 이들에게 상 주신다"(필립스역).
이런 번역도 있다. "하나님은…자기를 열심히 찾는 이들에게 상 주신다"(TLB)
나는 흠정역(KJV)이 마음에 든다. "그는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이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다."
부지런히- 얼마나 놀라운 말인가. 당신도 부지런히 찾으라. 갈급한 심령으로 구하라. 불굴의 각오로 순례 길을 걸으라. 이 책이 당신이 예수님에 대해 읽는 많은 책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하라. 이 시간이 당신이 그분을 찾는 수많은 시간 중 하나에 지나지 않게 하라. 소유와 지위에 대한 하찮은 추구를 박차고 나와 당신의 왕을 구하라.
천사들로 만족하지 말라. 하늘의 별들로 족하지 말라. 목자들이 그러했듯 그분을 구하라. 시므온이 그러했듯 그분을 바라라. 박사들이 그러했듯 그분을 경배하라. 요한과 안드레가 그러했듯 그분의 주소를 물으라. 마태가 그러했듯 그분을 집으로 모시라. 삭개오를 본받아 어떤 모험을 감행하고라도 예수를 보라.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 교리나 종교나 체제나 신조를 찾는 자들이 아니다. 이런 낮은 차원의 열망에 안주하는 이들이 많으나 상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면 족하지 않는 자들의 몫이다. 그 상은 무엇인가? 예수님을 찾는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마음, 바로 그것이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예수님처럼 되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을 생각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죄책감이 없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책감도 떨쳐 주시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나쁜 습관이 없으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쁜 습관도 없애시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당신도 두려움이 없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병든 자에게 긍휼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도전에 용감히 마서셨다. 하나님은 당신도 그와 같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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