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훈 2013. 1. 23. 14:44

 

1. 그녀1은 나를 profesor(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9학년 여자아이였다. 조금 길쭉한 얼굴형을 지닌 그녀는, 나를 약간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profesor!(선생님!)’, 나는 귀를 아주 잔뜩 기울이고 상냥하게 말했다. ‘si~(으응~)’. ‘puedo ir al baño?(화장실에 가도 되나요?)’ .........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데 그런건 여기서, 내가 화장실 못가게 할까봐 석고대죄라도 할 줄 상상했나 이거... 하긴 원래 무언가를 처음 경험한다는 것은 설레지만 약간 김빠지는 일이기도 하다.

 

2. 오늘 그녀2 역시 나를 profesor(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내가 요즘 가르치고 있는 문해교육 수업에 참석하는 아주머니다. 차코의 뜨거운 태양에 그을려버리셨지만, 얼굴을 가만히 보면 초등학교에 다닐 즈음에는 분명히 꽤나 귀염둥이 역할을 했을 모습이다. 그녀가 말했다. 'profesor!(선생님!)‘. 오, 이럴수가!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Si!!!(네!!!)’ 그녀의 다음 말은 아주 명확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허무했던 것 같다. ‘borrador(지우개)’ 앞뒤 다 자르고 딱 지우개라니,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기대했던 나의 잘못이 크다. 지우개를 드려야지. 지우개를 드렸다.

 

3. 부끄럽지만 이 곳 파라과이에서 ‘profesor(선생님)’ 소리를 들은건 위의 두 번의 경험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생질을 하고 있다.

그래도 난 선생님이야!

 

 

4. 선생질을 한다는 것은 뭘까. 한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에 관해 깨달은 사실은 딱 한가지이다. 선생은 자신의 존재를 던지는 사람이라는 것. 나는 아이들에게 과학이라는 교과목을 가르쳤었다. 낮과 밤은 왜 생기는지, 식물의 물관이란 무엇인지, 전기가 통하는 물체는 어떤 성질이 있는지. 열심히도 이것저것 가르쳤다. 하지만 학기가 끝날 때쯤 살펴보니 이놈들이 가르친 건 하나도 기억 못하고, 이상하게도 그냥 ‘나’처럼 되어있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 쓰레기를 버릴 때 손의 각도, 따지고 갈구는 듯이 말하는 태도. 하나하나 설명할 필요 없다. 그냥 이놈들을 보니 꼭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총체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냥 교실 속에 35명의 징글징글한 창훈이들이 숨쉬고 있었다.

 

5. 그래서 무릇 가르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주장하는 단한가지 교사의 자질이다. 무엇을 얼마나 잘 가르치냐 하는 것보다는, 교실 속에서 행과 열을 맞추어 조금은 명랑하게, 조금은 꺼벙하게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자신이 꼭 던져야만 하는 ‘좋은’ 존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초중고의 동창들과 모여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던가. 누가 무엇을 얼마나 잘 가르쳤냐보다는.

 

6. 교사가 가르치는 일을 ‘자신의 존재를 아이들에게 돌직구 해내는 일’이라고 가정하는 나의 교사론이 올바르다면, 한국의 교육은 쪼금 열악한 것 같다. 한국의 교실에서는 이상하게 '쎈척‘을 하게 된다. 아이들에게 밑보일 일은 절대 해서는 안되고, 목소리도 조금 고취하게 된다. 그러다가 단전에서부터 나오는 호랑이 소리로 어흥~ 할 때도 있고, 아이들 뒤에서 내가 그런 엄청난 소리를 냈다는 점을 뿌듯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교사로서의 나는 조금은 가식적이었다. 솔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던져지는 나의 존재도 분명히 조금은 왜곡되었을 것이다.

 

7. 그런 면에서는 파라과이는 앞서나가는 선진교육(???)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곳에서는, 아니 적어도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아무리 사제지간이라도 결국엔 똑같은 인간 대 인간이다. 선생님 소리보다는 선생님의 이름을 부를 때가 많다. 나는 정말이지 선생 취급을 못 받기 때문에 선생님 소리는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딱 2번 들었다. 고로 아이들 앞에서 쎈척을 할 필요도 없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함께 상대방을 놀리기도 한다. 쉬는 시간에는 교사 대 학생으로 배구게임을 깔깔대면서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예의를 상실하고 건방진 것도 아니다. 착하디 착하다.

 

8. 요즘 성인문해교육 아주머니 학생들과 부쩍 친해진 기분이다. 나름 그들의 입장에 서서 이해 안 되는 것을 이해하려고 했고, 신실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내가 알려주었던 스페인어 1음절들은 잘 기억한다는 것은 아니다. ‘mu? 이건 뭐지요?’ 하면 곧잘 ‘무’라고 읽는 것이 아니라 묵묵부답이다. 'ta? 이건 뭐지요?‘ 하면, 잘 기억해서 ‘따’라고 답변하는 것이 아니라 ‘따지지 말고 그냥 너가 한 번 더 말해줘’ 하는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요즘에는 들어오면서 나름 반갑게 ‘남(hola, 안녕)’이라고 인사한다. 내가 ‘따아꾸나쉬(como esta? 잘 지내요?)’ 물어보면 절도있게 ‘니쓰(bien, 좋아)’라고 말해준다. 집에 갈때는 ‘빠꿈(chao, 안녕)’ 작별인사 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나의 교사론에 비추어보면 나는 지금 잘 가르치고 있다.

문해교육 아주머니 학생들과 함께!

 

 

9. 부족한 선생이었지만, 그나마 한국에서 점심시간에 남자아이들과 축구했던 것이 참 잘했던 일인 것 같다. 함께 부딪히면서 뛰면서, 교사 나름의 긍정적인 면이 잘 전해졌을 것 같아서 좋다. 하라는 특별활동은 안하고 여자애들 모아가다 온갖 첫사랑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 그립다. 나의 이야기는 항상 내가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온갖 야유와 비명을 지르면서도 끝까지 들어주었던 아이들이 그립다. 아, 첫사랑 소설 이야기의 대상은 꼭 여학생들이어야만 한다. 남학생들은 진짜 들으면서 헛소리를 막 하면서 찬물을 확 끼얹는다.

 

10. 쓰고나니 웬걸 교육칼럼이 되어버렸다. 소소하고 깨알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