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처럼 살아라.
1.
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2.
황지우 <뼈아픈 후회>
ver1.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이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3.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의 준영(송혜교 분)의 아버지가 말했다. 시처럼 살아라. 사실 해당 에피소드의 제목은 ‘드라마처럼 살아라.’였다. 드라마처럼 인생을 살라는 예쁜 문장, 그리고 충실하게 뽑아낸 연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처럼 삶을 살아가라는 대사 한마디가 더욱 가슴 깊숙이 와 닿았다. 아름답게 하지만 때로는 슬프게, 그렇지만 황홀하게... 현실을 잘 반영하는 양질의 드라마가 많이 탄생한다. 하지만 마음 속 잔잔하게 울리는 숭고함은 아무래도 영상보다는 문장 속에 더 잘 담기는 것만 같다.
4. 윤동주의 <서시>는 이렇게 다가왔다. 대학시절, 싸이월드의 거친 파도를 타는 것은 나의 주요 일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우연히 나는 동아리 선배의 싸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선배는 다이어리에 항상 아주 짧지만 극도로 정제된 시 한편 한편을 올려놓았다. 핸섬한 외모에 차분한 성격. 그리고 항상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 그래서 바람이 불면 휘청거릴 것만 같은 그 모습이 윤동주의 <서시>와 어울려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5. 나의 육신의 아버지는 말했다. 말씀대로 살아라. 그리고 몸소 말씀 순종과 기도의 삶으로 신앙의 본을 보여주신다. 하지만 나의 뇌리 속에 박혀진 아버지의 가르침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렸을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노는 걸 좋아했다. 한번 나갔다 하면 귀밑에 거무접접한 땟국물이 흐를 때까지 놀다가 저녁 7-8시쯤에 기어들어오곤 했다. 항상 아버지의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날만은 성경을 펼치셨다.
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아버지는 나에게 절제를 가르치셨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회초리가 쉼을 얻었다는 의미는 확실히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나도 선생으로 살면서 아이들에게 절제를 가르친다. 그리고 갈등이 첨예하고 주장이 상반될 경우 내 의견을 끝까지 고수하지 않고 고이 접어두는 인생의 고난이도 테크닉도 배웠다.
7. 오늘의 포스팅은 시로서 '수미상관'하겠소.
8.
조병화 <노을>
해는 온종일 스스로의 열로
온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스스로 그 속으로
스스로를 묻어 간다
아, 외롭다는 건
노을처럼 황홀한 게 아닌가
9.
안도현 <배경이 되는 기쁨>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
누구의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별을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꽃을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
함께 하기에 더욱 아름다운
연어떼처럼
애기들 공사주고 사진찍으며 엄청 생색내기. 사진이 너무 이쁘게 잘 나왔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