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을 만들기로 하다.
1. 모든 1~3학년 학생들이 각각 100권의 책을 읽도록 하겠다. 이것이 내가 작년 야심차게 책 읽어주기 수업을 진행하면서 내건 목표였다. 그래서 한 학기동안 총 4 클래스의 학생들에게 7권의 책을 읽어주고, 의미 있는 독후활동을 진행해보았다.
2. 하지만 학기가 끝날 때쯤, 몇몇의 선생님들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다비드, 왜 내 수업엔 안 들어와?” 그래서 나는 “다음 학기에 들어갈게.”라고 쉽게쉽게 대답해버렸다. 그런데 새 학기가 시작되고 수업일정을 구상하다보니 1~3학년이 총 9개 학급으로 나뉘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년이 같더라도 부족으로도 한 번 더 나누니 들어가야 할 클래스가 너무 많았다. 학급 수도 잘 모르면서 애초에 이상한 목표를 설정한 것이 잘못이었다.
3. 곰곰이 생각했다. 일주일에 9 클래스는 죽어도 못 들어간다. 코이카 물품지원사업으로 멜로디언도 신청해놔서 음악수업도 해야 하는데 독서수업 9 클래스는 많아도 너무 많다. 이를 어쩌지. 큰 교실에 아이들을 빽빽이 앉혀놓고 한 번에 책을 후다닥 읽어버릴까? 그것도 좀 그런데……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학급문고’였다. 책을 각 학급에 조금씩 학급문고용으로 나눠주고 2주씩 돌려 읽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우리학교에서 다 돌려 읽으면, 근처 다른 학교에도 학급문고 형식으로 빌려줘야지! 하는 착한 생각까지 했다.
4. 그리고선 신나게 코이카 물품신청사업 목록을 수정해서 책을 샀다. 하지만 책들을 집으로 힘들게 운반해 놓은 이후로 머리를 싸매게 되었다. 짱구를 아무리 굴려 보아도, 머릿속에서 성격좋고 일 잘하는 학급문고 운영모델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목돈으로 아주 많은 책을 단 번에 구입할 수 있는 구입력이 없는 이상, 각 학급의 균일한 도서공급에 반드시 문제가 생겼다. 몇몇의 학급을 대상으로 하자니 학급간의 형평성 문제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5. 한 원숭이가 천장 높이 달린 바나나를 그림의 떡인양 바라만 보고 있다. 원숭이는 어떻게 하면 탐스러운 바나나를 입 속에 넣을까 부글부글 속으로 고민한다. 그리고 구석에 살포시 놓인 긴 막대기를 보고 외친다. ‘아하!’
아하!
6. 결정적인 통찰은 항상 ‘아하!’ 하며 다가온다. 책을 섣부르게 사 놓았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그리고 아순시온 행 버스를 타면서 외쳤다. ‘아하!’ 아싸리 학교에 작지만 내실 있는 도서관을 만들어주어야겠다. 어떤 면에서는 또 하나의 평범한 도서관사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적절한 컨셉이 떠올랐기에 얼른 마음 속에 꼭꼭 눌러 담으려고 종이에 메모까지 했다.
7. 그럼 왜 또 진부한 도서관일까? 사실 교육이라는 것은 교사와 학생이 한가로이 읽고, 쓰고, 토론하는 것 정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좋은 교육이 이루어지려면 충분한 시간과 양질의 도서가 필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다. (나 스스로도 치열하게 독서한다.) 그리고 성인문해교육TESAPE'A를 하면서 느낀 점도 한 몫을 했다. 나는 성인의 뒤늦은 문해능력 습득이 정말 완전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 현지인들은 그렇지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비문해자 학생들까지도 스스로의 문해능력 습득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별다른 지지나 협조를 받지 못했다. 책과 도서관은 그래도 어느정도 그 중요성을 현지인들과 공유할 수 있기에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8. 어쨌든 내가 상상한 학교 도서관의 컨셉은 ‘우리끼리nosotros nomas’이다. 우리끼리 똘똘 뭉쳐 만든 그냥 우리학교 도서관. 학교가 위치한 지역을 찬찬히 생각해보았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또 그렇게 가난하지만도 않다. 나름대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그렇기에 내가 무조건 일방적으로 책을 퍼다 줄 필요도 없다. 도서관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학교도 부모들도 돈을 내놓아야 한다. 코이카와 한국에서 온 봉사자는 아주 가난하기 때문에. 물론 그 과정에서 내가 아주 헌신적으로 도와준다. 이정도?
9. 컨셉을 상상하는 데에는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선용하자.’는 믿음도 한 몫을 했다. 다윗이 소박한 자신의 짱돌 던지기 기술을 선용해서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처럼! 파견지역과 꼭 맞게 내가 가장 파워풀하게 하고 있는 일은 ‘사진판매사업’이기 때문이었다. 학교의 발전의지가 부족하고, 나와 협력할 지역 NGO단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마을 최고의 사진사이기 때문에 어느정도 책을 구입할 만큼의 돈은 충분히 벌 수 있다. (충분히 못벌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10. 기관의 교장선생님과 협의해서 다음과 같이 컨셉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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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까지 총 1,000권의 책을 공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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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카 봉사자 다비드David는 1,000만 과라니를 출자한다. 이 돈은 봉사자의 개인적 기부가 아니라 지역을 대상으로 펼쳐지는 사진판매사업 수익금으로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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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각종 활동을 통해서 300만 과라니를 출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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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부모님들)이 300만 과라니를 출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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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좋은 도서관(대출) 시스템을 갖추고, 세 기관(코이카, 학교, 지역)의 대표들은 정부기관을 상대로 나머지 필요한 부분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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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도서대출을 권장하고 수업에서도 교사들이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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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500권을 돌파할 시,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인디헤나 학교에 책을 100권씩 빌려주는 시스템을 갖춘다. 500권 기준으로 250권씩 늘어날 때마다 수혜대상 학교를 한 학교씩 늘려나간다.
11. 그리고 나의 사진판매도 사진사가 직접 가정으로 출장을 다니는 형식으로 수정했다. 각종 행사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찍고, 직접 사진촬영의 요구를 해 온 사람들은 틀림없이 사진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사진판매사업에서는 사진을 남김없이 다 판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홍보를 위해 내 명함도 만들고, 선전물도 만들었다. 사진기를 들고 사람들을 보면 하나하나가 돈이다... -_-
내 명함과 선전물 이미지!
지역의 큰 슈퍼마켓 '꽈라흐'에 부착!
12. 학교 도서관 만들기의 세부사항을 설정하는 일에는 필라델피아 황경훈 선임단원의 자료를 많이 참고했다. 도서목록양식, 독후활동양식, 설문조사내용 등 많은 부분에서 도움이 되었다. 인터넷을 통한 질의사항에도 성실하게 답변해주셨다. 이곳에서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교사설명회 사진. 다행이도 딴지거는 선생님 없이 다들 내 생각에 잘 공감해주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