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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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스페인어를 잘 말할 수 있을까? 임지에 파견되고 3~4개월 동안은 회화 문장을 참 열심히 외웠다. 그때만 해도 내가 문장 암기를 지속해서 지금쯤은 스페인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임지파견 초에 외웠던 문장들은 나의 스페인어 공부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서바이벌 스페인어가 가능해진 이후로는 좀처럼 언어 공부에 대한 욕구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부하지 않았으므로 허접한 나의 스페인의 실력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에게 있다. 하지만 동기단원들의 쑥쑥 성장하는 스페인어를 바라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씁쓸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번 주 목요일에는 사무소 식구들과 함께 필라델피아에 있었다. 사무소 식구들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올라간 사이에 현지 목사님 오스칼Oscar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농담도 히죽히죽 주거니받거니 했다. 목사님이 나에게 말했다. “야, 너 이제 스페인어 잘 말한다!” “뭘 잘해, 아직 부족해!” 라고 답했지만, 통화를 마친 후 왠지 기분이 한껏 좋아진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을 아껴서 미용실에 들렀다. 원래 이발을 할 계획은 없었지만, 내 머리카락에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났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아야만 했다. 사무소 식구들에게 사고 난 내 머리모양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따뜻한 H1 차량에서 하루 종일 모자를 덮어쓰고 있어야 했다. 정말 더웠다. 누군가 이 문단을 읽으면서 마음속이 찔려온다면, 땅을 치고 옷을 찢어가며 회개하시길 바란다! 히히 :)
내가 찾아간 미용실은 남자 전용 미용실이었다. 남자 미용사 두 명이 일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내가 원하는 머리 스타일을 말했다. “2센티미터로 똑같이 밀어주세요.” 아저씨는 정말 박력 있는 목소리로 “아주 좋아, 아주 좋아! Muy bien, Muy bien” 크나큰 발성을 하시더니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하신다. 이발 중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발사 아저씨가 말했다. “이야, 너 스페인어 말 잘 한다. 너의 아빠가 파라과이 사람이니?” “아니다...” 내가 어떻게 생겨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버지는 용답동 YM아파트에 살고 계시는 강목사님이시란다.
내 머리는 어떻게 되었냐고? 이발사 아저씨는 2센티미터로 똑같이 밀어달라는 내 요구를 너무나도 잘 알겠다고 말했지만, 내 머리는 그만큼 짧아지질 않았다. 그래도 좌우 균형을 잘 맞춘 걸로 만족하고 있다. 이발을 마치고 나는 현지미용실에서는 내가 요구하는 스타일과는 상관없이 동일한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다음에 미용실에 방문하게 되면 염색을 해달라고 해봐야겠다. 그래도 가위질로만 단정하게 머리를 손질하는지 확인해봐야겠다.
사무소의 산타마리아 초등학교 방문. 조예슬 관리요원님과 봉사단원담당 마르꼬Marco. 이수현 인턴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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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에 출연했다. 연초에 임지인 Santa Teresita에 라디오기지가 생겼고, 매주 토요일 교장선생님Maria Concepcion이 9시부터 11시 30분까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나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하는 도서관이용교육 일정안내를 홍보하고자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나섰다. 10시에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출발하기 이전에 내가 할 말을 정리해서 적어놓았다. 하지만 이게 웬걸, 라디오에 도착하고 보니 내가 적어놓았던 종이도, 나의 목소리를 녹음하려고 챙긴 아이패드도 다 놓고 온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걱정이 많이 됐다. 안 그래도 스페인어를 잘 못하는데, 라디오까지 나와서 버벅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라디오 방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니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교장선생님은 먼저 음악을 틀었다. 음악이 끝나면 그 사이에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달된 문자메시지들을 읽는다. 가끔 전화도 온다. 그럼 핸드폰 스피커를 마이크에 직접 ‘손’으로 연결한 후 대화를 한다. 중간에 하울링 소리가 아주 끝내준다. ‘뭐야 이거... 이거 걱정할 필요가 없겠는데?’
10시 30분쯤 나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내가 여기에서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말했다. 그리고 내가 임지의 아이들을 위해서 도서관을 조성하고 싶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판다. 사진 사이즈당의 가격은 얼마 얼마고 내 휴대폰 번호는 이렇다. 외국인 한 명이 홀로 여러분 자녀들을 위한 도서관을 완성할 수는 없다. 함께 일하고 싶다. 다음 주 수요일 오후 5시에 학교로 와라. 함께 나의 생각을 공유했으면 좋겠다. …… 나름 잘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이정도 하면 나의 라디오 분량이 끝이 난 줄 알았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청취자들에게 음악 하나를 듣고, 나를 다시 만나보자고 했다. ‘뭘 어쩌잔 거지?’
결국 나는 프로그램 종료시간을 넘어서 12시까지 라디오에 출연해야만 했다. 음악을 듣고 다시 청취자들을 만났고, 또 음악을 들었다. 토요일 당일 왜 북한의 큰 안경을 쓰셨던 분의 아드님께서 미사일 3발을 날리셨는지, 왜 자꾸 나한테 북한에 대해서 묻는 거냔 말이다. “예전에 큰 안경을 썼던 북한의 독재자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그 아들이 북한의 모든 세력을 효과적으로 중재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고로 세계를 향해 무엇이라도 보여줄 필요가 있는거죠.” 아주 정치평론을 하셨다.
뭐, 재밌었다. “토요일 오후에는 항상 동네에 배구시합이 있다. 시합에 나가기 위해서는 먼저 팀을 구성해야 한다. 혹시 우리 팀에 들어올 생각 없나?” 하는 안 감독님의 제의를 받기도 했다. 음악이 나오는 사이에 수다도 떨고, 마떼mate를 마셨다. 라디오에 출연 중이라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을 물어보면 그냥 ‘허허허’ 웃어버렸다. 뭐 이딴 라디오 방송이 있나 싶었지만, 혼란 속에 질서가 있듯이 나름 순서와 격식을 갖춰가며 프로그램을 열심히 진행하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에 실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프로그램 도중에 라껠Raquel 선생님에게 온 문자 메시지가 무엇보다 반가웠다. ‘Hablas muy bien. Damaris te esta escuchando! (말 잘하네. 내 딸이 너의 라디오를 듣고 있어!)’
라디오 고유 번호는 없다. 그냥 본인의 핸드폰을 방송에 사용한다. 셀카 찍느라 힘들었는데 사진찍는다고 그걸 또 마이크에 대고 다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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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있는 집 자식은 다르다. 토요일 저녁에는 왈떼르Walter(교장선생님의 남동생) 딸의 생일이었다. 교장선생님의 집안에는 임지인 Santa Teresita에서 방귀 꽤나 뀌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방귀를 뀌면 돈을 버는지 역시 생일잔치 장식이 지난번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예쁘고 세련된 맛이 있었다. 파라과이에서 생일잔치가 열리면 친구들이 선물을 하나씩 들고 오는데, 그것들을 담아두는 통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오늘의 생일선물 보관함은 정말로 그란데하고(크고) 예뻤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풍요롭게 산다는 것은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자신 있게 요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지난번 생일잔치 때는 나를 출장 사진사로 불러놓고도, 수줍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구하질 못했다. 내가 이렇게 찍어보자, 저렇게 찍어보자 해서 겨우겨우 조금의 사진만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깐 조그만 꼬맹이도 와서 나보고 사진 좀 찍으란다. 이놈, 너에겐 얄짤 없이 씽코밀(현지화폐 5000과라니, 원래는 사진가격으로 4000과라니를 받는다)을 받겠다! 또한 생일 집에 방문하기로 한 오후 5시가 가까워지자 늦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핸드폰으로 네 통씩이나 쓸데없이 부재중 전화를 남겼다. 덕분에 판매할 사진을 많이 건지기는 했다. 역시 똥이 굵은 있는 집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참 많이 다르다.
꼬맹이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당돌하게 요구했다. 그래 찍어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