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마와 술미따들
파라과이에 살면서 내가 아주 지긋지긋해하는 스페인어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깔리또Carlito’.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이름의 뒷부분을 살짝 변형하여 애칭으로 만들어 부른다. 후안Juan은 후안씨또Juancito, 다비드David는 다비쵸Davicho, 이런 식이다. 깔리또 역시 스페인어의 전형적인 이름, 까를로스Carlos를 귀엽게 부르는 말이다. 보통 아이들에게 많이 사용한다.
나의 머리를 한껏 지끈거리게 하는 이 깔리또는 우리 집 주인의 초등학교 2학년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그놈이 어찌나 소란스러운지, 좀 조용히 뭔가에 집중해보려고 하면 꼭 그놈이 산통을 깨고 만다. 형 마르코스Marcos가 부르는 “깔리또!! 깔리또!!!!!!!~~”, 친구들이 부르는 “깔리또!! 깔리또!!!!!!!” 그럼 나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다. ‘응답하라, 깔리또...’ 집 주인이 수다스럽고 요란법석해서일까? 이 아들놈도 마찬가지다.
하얀 옷을 입은 아이가 문제의 깔리또이다.
자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를 닮을 수밖에 없나보다. 외모야 당연하고, 성격과 가치관도 꼭 닮아가는 것 같다. 얼마 전 시작한 음악동아리에 안드레아Andrea라는 8학년 학생이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피아노 오른손을 재빨리 마스터하고, 왼손연습에 진입한 이 똑똑한 친구는 바로 학교 교장선생님 마리아 콘셉시온Maria Concepcion의 딸이다. 나는 안드레아와 대화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말투가 엄마와 정말 똑같기 때문이다.
안드레아가 집으로 돌아간 후, 도서관 사서선생님인 파티마Fatima에게 말했다. “Ella habla igualito con su mama. 안드레아는 진짜 엄마랑 똑같이 말하더라.” 선생님이 말한다. “Jajaja, igualito!! 하하하, 응, 정말 똑같지!!”
안드레아(위), 마리아 콘셉시온(아래)
한국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다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학부모님들과 많이 접촉하게 된다. 유형은 다양하다. 우리 아이가 학급 내 달리기 대회에서 일등을 했는데 도대체 왜 억울하다고 하는 건지, 친구들끼리 인터넷에서 카페를 만들었는데 우리 아이는 왜 그 멤버가 되지 못했는지 등등, 그럴 때마다 “아, 그러세요? 제가 한번 알아보고 아이와 이야기해볼게요.” 하고 대충 마무리를 짓지만, 그런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고비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학부모 상담 주간!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젊은 남자교사가, 대한민국 아줌마들을 어떻게 상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그리고 내가 세운 작전은, 내 밑천이 다 드러나기 이전에 학부모님들에게 아이에 관한 질문을 먼저 퍼붓자는 것이었다. (항상 싸움의 승리 전략은 선빵이다. 우리 외삼촌은 항상 나에게 친구와 싸울 때는 친구의 코를 먼저 치라고 친절히 알려주셨다.)
“제가 아직 학급담임이 된지 얼마 안됐잖아요? 그래서 누구누구를 깊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 오늘 상담은 누구누구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해서요.” 이렇게 운을 띄면 보통 학부모님들이 상담을 쭈욱 리드해주셨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항상 느끼는 게 있었다. 학부모가 다녀간 후, 아이들과 다시 생활하다보면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놈, 참 엄마랑 똑같네. 성격도, 말하는 것도.’
사실 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동안 관찰한 바에 의하면 부모님에게 좋은 가정교육을 확실히 받은 아이들은 학교교육이 별로 필요가 없었다. 가정에서 잘하는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잘했다. 교사에게 잘하고, 그렇기 때문에 교사가 출제하는 시험에도 강했다. 정서적으로나 생활태도에 문제가 있는 아이들의 경우, 대부분 그들의 가정이 파괴되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마을에 축제가 있었다. 덕분에 학교는 휴교가 되었고, 나는 음악동아리를 운영하는 교사가 아닌, 사진사로서 카메라를 들고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학교에 갔다. 학교는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나는 그 바쁜 와중에 준비된 기다란 의자 한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그때 내 카메라에 술마Zulma선생님과 그녀의 술미따Zulmita(술마의 애칭)들이 들어왔다.
‘거, 참, 똑같네.’
오른쪽 아래가 술마선생님. 세 딸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마흔 번의 겨울이 그대 이마 포위하여
그 아름다운 들판에 깊은 참호 팔 때,
지금은 뭇 사람들 눈길 끄는 그대 화려한 의상
무가치한 넝마로 변하리라.
그때 그대 온갖 아름다움 다 어디로 갔느냐고
그대 무성한 청춘의 보물 다 어디 있느냐고 누가 묻거든
해골처럼 팬 그대 두 눈 속에 있다고 대답함은
만사를 소진하는 게걸스러운 치욕이요, 무익한 칭찬이라.
<이 잘생긴 내 자식 놈이 내 종합 계산서요
내 늙음의 구실이외다>라고 그대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아름다움 선용했다고 얼마나 칭찬 자자하랴,
자식의 미모 그대의 유산임을 증명하리니.
이것이 그대 늙었을 때 회춘하는 방법이요,
그대 피 식었을 때 다시 덥히는 방법이리니.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