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보랏빛?
글을 잘 쓰고 싶어 무작정 황순원의 ‘소나기’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벌써 여섯 번째다. 한 문장 한 문장씩 손으로 꼭꼭 눌러 공책에 담아내니, 글을 후다닥 대충 읽고 마는 나에게도 기억에 남는 몇몇 단어들이 생겼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쪽빛’.
황순원의 ‘소나기’ 하면, 사람들은 ‘보랏빛’을 이야기한다. 소녀의 죽음을 상징한다는 그 보랏빛.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 속엔 ‘쪽빛’이 자리 잡아버렸다. 황순원의 소설이, 아니 그의 동화가 분명 쪽빛 같아서겠지.
쪽빛이 어떤 색인지 잘 모르겠다면,
빨래하기 좋은 날 고개를 들어 파라과이의 하늘을 바라보면 된다. 그게 바로 쪽빛이다.
그대가 한국이라면, 쪽빛을 발견하기에 힘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싱긋한 봄날, 그대의 가슴이 어느 때보다 화창하다면 쪽빛을 발견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지난 주 아순시온에서 반가운 손님이 잠시 집을 들렀다. 머나먼 길을 오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삼겹살이네 김치네 해서 두 손이 한 가득이었다. 고마웠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왜 새로운 글들을 올리지 않는지 알겠다고 했다. 정말 에피소드가 없는 조용히 동네인 것 같다고. 웃고 말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글감이 생각날 때마다 아이패드 뚜껑을 열어 메모해 둔다. 다만 게을러서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리기가 힘들 뿐.
자리를 비운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주일에 서너번씩 장례식이 줄을 이었고, 그 중에 하나는 개에 물려 죽은 일곱 살 어린 아이였다.
현지인들과의 농담은 언제나 재밌지만, 그중의 백치는 바로 ‘똥’ 이야기다.
식당에서 먹던 음식에 벌레가 나와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넘어가던 내가 컴플레인 하는 방법을 배웠다.
7, 8 학년 시험기간이라고, 시간이 없어 피아노를 배우러 오지 못하겠단다. 찬바람을 꽤나 맞았다.
김C가 얼마나 유능한 가수인지도 알았다. 그는 못생기고 특이하나, 참 훌륭한 실험적 아티스트였다.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도 조금씩 체득해나가고 있다. 매일매일, 오랫동안, 꾸준하게.
주변에서 나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너무나 다양했다.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건망증에 시달려 깜빡깜빡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덕분에 한껏 우울했다.
많은 피에스타. 똑같은 사람이 매번 같은 음악에 맞춰 동일한 춤을 춘다. 그것도 똑같은 표정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 그냥 그렇다구요. 지루할 틈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