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28. 14:27ㆍKOICA 해외봉사활동/상상하고, 추억하며 2013
1. 주일 아침이다.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먹고 샤워를 한다. 마을에서 사역하시는 현지목사님이 한 달 동안 수도로 휴가를 떠나시는 바람에 요즘엔 혼자 예배를 드린다.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린다. 성경도 읽고, 가정예배 어플의 설교말씀도 본다. 물론 신앙생활이야 교회중심, 공동체중심이어야 하겠지만, 혼자서 예배드리는 맛도 아주 쏠쏠하다.
2. 그리고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을 본다. 책도 읽고, 스페인어 공부도 해야 하지만, 오늘은 주말이니깐... 스스를 위로하면서. 그나저나, 한국드라마도 정말 많이 발전했다. 어찌 이렇게 드라마를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뽑아냈는지. 그저 ‘쌔끈’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드라마 동영상을 모니터 한쪽으로 치워놓고 네이버에 ‘드라마 작가’라고도 검색도 해본다.
2008년작이란 것을 알고 놀랐다. 사람의 심리를 부드럽게 잘 표현했다.
3. 전화 한통이 왔다. 기다리던 전화는 아니었고, 얼마 전에 사귀었던 Luis(루이스)라는 친구다. 맥주 마시면서 놀잔다. 그래서 나는 맥주 안마시니, 콜라 마시자 했다. 우리 집에서 요리해서 푸지게 먹잔다. 그래서 우리집 더럽고, 먹을거 하나 없다 했다. 결국 본인이 멧돼지 아사도 요리를 대접하겠다고 해서, 오케이 해주었다. 곧장(en seguida) 온다길래 드라마 하나를 더 틀고 그 세련됨에 다시금 빠져들었다.
4. 그런데 이녀석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이곳에서 곧장 오겠다는 말은, 자기가 오고 싶을 때 오겠다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나의 냉동실 내용물을 점검해본다. 자슥, 얼른 데리고 나가야지. 오토바이 뒤에 올라탄다.
5. Luis의 직업은 군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군부대로 들어갈 줄 알았다. 하지만 계속 달리더니, 임지인 Santa Teresita 마을 로 들어간다. 어느 가정집에 도착했는데 사람들이 제법 많다. 25명 정도? 무슨 일이냐고 했더니, 까르나발이란다. 응? 까르나발? 까르나발은 이런게 아닌데, 막 이쁘고 섹시한 아가씨들이 행진을 하고, 인공 눈을 서로에게 뿌려대는 축제라고 들었는데... 이상하다. 인디오들만 모여있는 거야 당연하고, 아가씨는 커녕 대다수가 중년 이상의 아저씨들이다.
6. 5명의 아저씨 악공들이 화려한(?) 까르나발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고, 그 리듬에 맞추어 아줌마 2명, 아저씨 2명, 꼬맹이 1명이 원을 돌면서 춤 아닌 춤을 추고 있다. 아무래도 악장은 선율을 맡은 저 피리아저씨일 것이다. 꼭 단소처럼 생긴 피리를 불다가 아저씨는 입이 마르는지, 계속 연주를 멈추고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 4 명의 인디오 전통북 주자들은 2박의 ‘딴-따단’의 리듬을 무한반복으로 쳐낸다. 이왕 할거면 막 분장도 하고 해서 폼나게 할 것이지, 다들 뜨랑낄로 의자에 편히 앉아서 연주한다. 어떤 아저씨는 선그라스도 썼다.
7. 에휴, 현빈과 송혜교가 선사해주었던 세련됨의 극치에서, 다시금 나는 원시시대로 돌아왔다. 입에는 멧돼지 아사도를 물고.
8. 하지만 나는 조금은 지긋지긋한 이 광경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이들은 진정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나의 판단엔 얼마 전에 읽은 독일의 저널리스트 바스 카스트가 쓴 ‘선택의 조건’이라는 책이 한 몫을 했을 것이다.
9. 책의 초점은 왜 우리는 유사 이래로 찾아볼 수 없는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을까, 아니 불행할까 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사실상 우리가 정신적으로 어느 정도 결핍되어 있고, 특히 우리에게 포근함을 주는 인간관계가, 우리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친밀한 관계의 상실은 바로 ‘부(富)’, 즉 우리가 악착같이 벌어들인 돈 때문이라고 말했다.
10. 생각해보면 참 사실이다.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사회에서 훌륭한 커리어를 쌓으려면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 당연히 소중한 가족, 친구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별을 보고 출근하고, 달을 보며 퇴근하는 삶에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인간관계가 있을 수 없다.
11. 그래서 더 악착같이 돈을 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갑에 돈이 있는 한에서,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우울한가? 돈만 있다면 근사한 식당에서 나를 임금님, 마마님 대접해주는 웨이터에게 서비스를 받으며 식사할 수 있다. 돈이 전부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돈의 효용은 일시적이다. 왠지 모르게 끌고 가면 끌고 갈수록 돈이 선사하는 인간관계의 충만함은 허무해진다.
12. 하지만 가족과의 관계, 정말 내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단번에 달려와 줄 친구들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내가 거지꼴로 실패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나를 사랑해줄 것이다.
13. 형편없는 까르나발을 보며, 나는 인디오들이 현대의 문명에서 나름 거리가 있는 폐쇄적인 마을에서 지긋지긋하게 살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돈과 도시가 가져다주는 물질적인 풍요가 부족한 상태에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저 그런 남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끼리끼리 살면서 돈이라는 매개체를 제외하고, 인간적인 관계 그 자체를 교환한다. 예를 들어볼까?
14. 우리집 tv가 망가졌다. 현지 친구들 말로 plata(돈)을 두 주머니 가득 가지고 있는 나는 서비스센터에서 as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얼굴도 처음 보는 아저씨가 와서 냉장고를 고쳐주겠지.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동네에서 가장 전기제품 잘 만진다는 사람이 와서 만져줄 것이다. 그저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 집 자식놈이 언제 아프다고 할지 모르니. 내가 키우는 소 한 마리가 어디로 달아날지도 모르니 말이다.
15. 돈을 벌고 커리어를 쌓는 무한경쟁의 궤도에 들어선 나에게 이들이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을 시시콜콜하게 해보았다. 항상 그늘에 오순도순 모여 앉는, 그저 웃는(정말이지 대화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경우가 없다), 별 대단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맥주를 홀짝이며 즐겁게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역시 세계행복지수 1위의 파라과이의 위엄을 보여준다. 그들의 머리에는 마을 내 복잡한 인간관계의 구조도가 자리잡고 있다. 누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누가 누구의 형제인지, 누가 어디가 아픈지...
16.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日常)’을 묵묵히 견뎌가다 보면, 분명히 ‘일상(一賞)’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내가 정한 규칙들을 지키며 하루하루 살다보니, 오늘은 조금은 지긋한 현실이 조금은 색다르고 아름답게 보인다.
17. 예전에 스페인에서 온 봉사자가 있었다. 3주 동안 봉사를 하고 작별 파티를 하는데, 그때 지갑을 도둑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 같았으면 경찰에 신고하고 말겠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나름 방구 좀 뀌고, 머리 좀 쓴다는 남자들 모여서 ‘과학수사’를 진행한 것이다. 각자의 심증들을 내놓으면서, 현장에 모든 상황들을 종합해보면서.
18. 부끄럽지만 나는 그때 가장 유력했던 용의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몰래 미행했었다. 선임단원인 현웅이형과 함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으로 갈아입고, 손전등을 켰다 껐다 하면서... 상대가 현지인이었기 때문에 부담이 되었지만, 내 이 놈을 잡아보리라 하는 정의감으로, 꼭 지갑을 잃어버린 봉사자를 도와주고 싶다는 천사같은 마음으로 말이다.
19. 결국 나의 실수로 미행하던 용의자를 놓치고 말았지만, 그때 느꼈던 유대감이란.
20. 분명히 대한민국 강력계에서 팀을 이루어 활동하는 이형사와 김형사는 충만한 인간관계가 과연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파라과이 4명의 동기들과 함께.
우리 형님들까지. 한국으로 무사귀환 할 때까지 우리 모두 힘을 내자구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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