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9. 09:45ㆍKOICA 해외봉사활동/상상하고, 추억하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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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도서관 조성모델을 상상하면서 내가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바로 재정의 ‘자립도’였다. 코이카KOICA나 다른 무상수혜기관을 통해서 지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 학교, 지역)가 모두 힘을 합쳐서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교사설명회를 통해서 현지선생님들의 동의도 구했다. 교장선생님이 물었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1,000권의 책을 비치하려면 이정도 책장armario(두 손으로 활짝 열 수 있는 ‘옷장’ 스타일)이면 될까?” 무심코 대답했다. “응, 그 정도면 될 것 같은데?”
C.S.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하지만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도서관의 책을 비치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표 1,000권은 각 분야별로 분류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그렇다고 책 하나하나마다 일일이 번호를 붙여서 관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더구나 번호를 붙일 수 없을 정도로 얇은 책도 많다). 괜히 사서교사가 있는 것이 아니구나! 도서관 관리 자체가 공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자 그분이 찾아오셨다. 아하!
'아하!'가 궁금하시다면: http://changhun.tistory.com/entry/도서관을-만들기로-하다
세로에서 가로로의 전환! 우리는 일반적으로 책을 세로로 차곡차곡 세워놓는다. 주어진 공간에 최대한 많은 양의 책을 비치하기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1,000권의 책은 우리학교의 넓은 도서관 공간에 비해 턱없이 적은 양이다. 그리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도 현지인들이 책장의 문을 자물쇠로 걸어 잠그는 일이 없어야 한다(실제 봉사단원들이 구입한 도서들은 자물쇠를 잠긴 책장 속에 머무를 때가 많다. 아이들이 빌려보면 책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이유로!). 그래서 나는 책의 표지가 보이도록 책을 가로로 배치하기로 했다.
이 생각을 떠오르면서 나는 정말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적은 양의 책으로 아이들의 넓은 시야를 확보한다. 그리고 기존의 책장처럼 열고 닫는 문이 없기에 아이들의 책에 대한 접근성을 확장시킬 수 있다. ‘책을 읽길 잘했구나, 역시 이래서 많은 저자들이 책을 꾸준히 읽으라고 했던거구나! 세로에서 가로로 발상을 전환시키다니!’라고 자뻑에 자뻑을 거듭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의 교보문고에도, 파라과이 서점 El lector에도 이와 같은 진열 방식을 취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Face진열’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진 소위 요즘 대세를 이루는 도서진열방식이었다. 모르겠다, 여튼 기특한 나는 이걸 혼자 생각해낸거다 분명히!
아이디어를 생각하며, 성경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제작된 독서대 스타일의 교회 의자를 떠올리기도 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교회의자 사진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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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도서관 벽 자체에 긴 나무를 붙이려고 했다. 나무를 가로세로 일정한 간격에 맞추어 접착하고 그 위에 책을 진열하고자 했다. ‘하지만 벽이 망가지지는 않을까?’ 내가 여러 개의 나무를 접착할 정도로 튼튼한 벽의 종류를 알 리 없었다. ‘일단 목수 아저씨를 찾아야겠다!’ 생각하고 집 근처 목공소에 찾아갔다. 정말 이런 종류의 일에 관심조차 없었지만 파라과이는 모든 걸 할 수 있게 한다. 목수아저씨와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나의 모습이 적잖이 새로웠다.
목수아저씨를 학교로 데려와 벽의 상태를 살폈다. 벽에 못을 대고 망치를 두드려봤더니 이런, 부서진다. 벽에 나무를 직접 붙여 저렴하게 도서관 인테리어를 처리한다는 나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목수아저씨는 차라리 일종의 가구를 만들자고 했다. 더 비싸기는 하겠지만, 나의 아이디어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한번 만들어보자고 했다. 내가 스페인어를 잘 이해 못할까봐 일단 아저씨에게 그림을 먼저 그린 후, 함께 보며 상의하자고 했다. “언제쯤 설계 그림을 볼 수 있을까요?” “음, 다음 주 화요일!”
다음 주 화요일이 되어 목공소에 찾아갔다. “그림 나왔어요?” “아니, 요즘 너무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네.” “그럼 언제쯤 다시 올까요?” “음, 다음 주 수요일!” 다음 주 수요일이 되어 다시 한 번 방문했다. “그림 나왔어요?” “진짜 미안해, 일이 너무 밀려서.” “그럼 언제쯤 다시오면 되요?” “음, 다음 주 화요일!” ...... 목공소에 나오며 생각한다. ‘Hay mucha martes!’(일 년 중에 화요일은 아주 많아)
마리스깔 에스띠가리비아 목공소
그 다음 주 화요일이 돌아와 목공소에 찾아갔다. 날 보자마자 목수아저씨가 웃는다. “아직도 안됐어요?” “응, 진짜 미안하다.” “아니, 그림만 부탁했는데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요?” 하고 그냥 내가 그 자리에 앉아 그림을 쓱쓱 그렸다. 나의 그림실력은 정말 젬병이다. 또한 가구인지라 나름 3차원으로 그려야 했다. 그야말로 나의 수준 이상이었다.
내 3차원 그림. 정말 힘들었다!
“이렇게 해주면 될 것 같아요. 이해 되요?” “완벽해perfecto” 부글부글 끓으며 목공소에서 나왔다. 목요일쯤 된단다. 학교에서 사서 선생님이 언제쯤 가구가 도착하는지 종종 물었다. “Depende de el carpintero. Me dice el jueves terminare todo. Pero sabe que, en Paraguay hay mucha jueves, verdad?”(목수 아저씨에게 달렸어요. 나한테는 목요일쯤 모든 것이 완료된다고 했어요. 하지만 알죠? 파라과이에 목요일은 무진장 많다는 걸!) 하지만 놀랍게도 실제 가구 제작은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중간 점검 차 목공소에 방문했는데, 가구제작이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오호오호!
그리고 대망의 목요일 도서관으로 가구를 운반할 수 있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가구를 설계해보았고, 아주아주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생각했던 것만큼 결과물이 잘 나와서 좋았다. 선생님들도 아주 예쁘다고 칭찬해주었고, 장난삼아 자신의 집에도 아들을 위해 똑같은 가구를 만들어야겠다는 농담도 해주셨다. 사진판매사업 예산이 허락하는 내로 몇 개의 가구를 앞으로 더 만들어서 벽을 두르고 싶다. 재정자립뿐만 아니라 도서관의 예쁜 책표지들로 아이들의 시야를 확보하고 싶은 마음이다.
가구가 학교에 도착!
조심히 운반해주세요!
딱 가구 세 개를 제작했지만, 너무너무 비쌌다.
파라과이에서 저런 인위적인 사진찍기는 선수가 되어가는 것 같다.
뭐 이정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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