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23. 14:10ㆍKOICA 해외봉사활동/상상하고, 추억하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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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 같았으면 두 손을 들고 비를 열렬히 환영하다가 다시 골아 떨어졌을 것이다. 비가 오는 당일 학교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기 때문에 나정도(?)의 선생님은 출근하지 않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비가 와서는 안 되는 날이었다. 학생들의 도서관 대출과 관련하여 오후에 학부모 모임을 주최했기 때문이다. 어제 부모교육 내용까지 포함하여 야심차게 발표 자료를 만들어 놓긴 했지만, 아무래도 비를 뚫고 나에게 달려올 학부모들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비가 와락 쏟아졌다면 온 동네가 물바다가 되었을 테지만, 오늘은 빗방울이 사뿐히 내려앉아 충분히 걸을만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비가 아주 많이 내린 날은 내가 당면할 어려움을 충분히 예상한 후, 신발이 젖지 않게 조심조심 다닐 수 있다. 하지만 오늘 아침 7시 아무도 발걸음을 내딛지 않은 촉촉한 땅은 예기치 않게 나를 자꾸 넘어뜨렸다.
학교에 다 도착하니 파티마Fatima선생님이 창문으로 날 넘겨보며 실실 웃고 있다. “뛰어Corre, 뛰어Corre” 내가 허탈하게 웃자 “점프해Salta, 점프해Salta” 한다. 교장실로 들어가서 “나 오늘 오다가 3번 자빠졌다”라고 말하려는데, 동사 ‘caer(넘어지다)’와 ‘casar(결혼하다)’가 마구 헷갈린다. ‘어이구, 내가 언제부터 생각하고 말했다고…’ 하고 “Hoy me case tres veces.(오늘 나 세 번 결혼했어요.)”라고 말했다. 선생님의 응답은 “Porque no me invitaste?(왜 나는 초대 안했어?)” ...... 그때야 비로소 내가 ‘결혼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를 사용했음을 알았다. 에라, “Porque vos no me importa.(왜냐하면 너는 나한테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깐)” 하고 꼭 “Malo나쁜놈” 소리를 듣는다. 속이 시원하다.
이 정도는 되야, '비가 많이 왔구나...' 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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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 모임은 연기됐다. 원래 오늘은 과라니족 학부모님들과 내일은 니바끌레족 학부모님들과 모임을 갖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 모임은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으니 금요일로 옮겼다. 니바끌레족 학부모님들과의 만남은 그대로 두었다. 생각보다 모임을 연기하는 것이 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로 한방에 해결할 걸, 했지만 오늘 어차피 음악수업도 해야 했기에 교사의 고매한 양심을 지키는 걸로 스스로를 위로해보았다. 4학년 수닐다Zunilda선생님은 6명의 학생들이 왔다. 그리고 5학년 구스타보Gustavo선생님은 교실에 혼자 앉아 계셨다. 고로 오늘은 수업 한 시간이 준 셈이다. “Que suerte Gustavo no tiene su alunmos!(5학년 애들 아무도 안와서 너무 좋다!)” 역시 교사, 학생 모두에게 최고의 강의는 '공강'이다.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에 들어가자 파티마Fatima선생님과 술마Zulma선생님이 내 바지와 신발에 묻은 진흙을 보면서 키득키득 웃는다. “아니 왜 여기는 사람 지나다니는 인도를 안 만든거야?” 술마 선생님이 말한다. “그러니깐. 내가 항상 말했어. 아스팔트를 깔아야 한다고!” “하지만 아스팔트는 여름에 온도를 더 높게 하잖아. 그냥 필라델피아에 있는 인도 같은 것 말이야” “그럼 네 프로젝트로 마을에 인도를 깔아보는 건 어때? 히히”
관두자 관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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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과이도 제법 쌀쌀해졌다. 기온은 15도 정도 우리나라 가을정도 날씨이긴 하지만, 난방시설이 부재하기 때문에 집 안에 있어도 제법 한기를 느낄 수 있다. 아침저녁으론 꽤나 쌀쌀해서 전기장판 위에서나 잠을 잘 수 있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이정도의 날씨에 파라과이 사람들은 목도리와 장갑까지 착용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우와 오늘 정말정말 춥다!”라고 말하면서 견딜 수 있겠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옷에 묻은 진흙들을 닦아냈다. 그리고 오늘은 바깥출입을 삼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다. 돈이 없어도 잘 챙겨먹고 살아야겠다는 나의 원칙을 고수하여, 장가방인 코이카 배낭을 둘러매고 슈퍼마켓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런데 내 앞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간다. 산타마리아 학교의 중학생이 집으로 하교하는 것이다. 옷은 가볍게 학교 유니폼을 입었지만 목에는 목도리가 둘려있다. 잠시 후, 나를 지나간 다른 오토바이의 주인공의 목에도 역시 목도리가 둘려있다.
목도리를 빠짐 없이 한 것을 보니, 아이들 나름의 멋이자 패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춥긴 참 춥나 보다. 한국의 겨울도 많이 추웠다. 몸을 옷으로 겹겹이 두른 후에 잠바로 마무리했다지만, 집으로 향하는 저녁 추위가 뼛속까지 전해지는 날이면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집까지만 가면 된다. 집까지만 가면 된다.’ 어려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추위에 덜덜 떨었지만 집에만 도착하면 나를 위한 따뜻한 이불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맛있는 귤을 얼굴이 노래질 때까지 먹을 수 있었다. 그 때 먹은 귤의 영향으로 아직까지 얼굴은 조금 노랗지만,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확실히 따뜻한 겨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교하는 파라과이 아이들을 보고 조금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난방시설이 없는 이상, 쟤네들은 집에 돌아가도 추울 텐데...’ 하지만 그들도 분명 집으로 돌아가는 그 ‘따뜻함’을 이해할 것이다. 집이 따뜻하지 않다 한들,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꽤나 따시게 해줄테니깐,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마떼도 있지 않은가? 아씨, 애들을 불쌍해하다가 갑자기 내가 서러워지려고 한다. 더욱이 파라과이 우리집에는 만다리나(파라과이 귤)도 없다. 나 돌아갈래~~ 누가 나 만다리나 좀 사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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