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잡아라Seize the day

2013. 3. 13. 10:36KOICA 해외봉사활동/상상하고, 추억하며 2013

1. 2011년 겨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집근처 구립도서관에서 미국 소설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Seize the day’를 읽었다. 고전답지 않은 책의 두께덕분에 부담 없이 읽어낼 수는 있었지만, 내용이 기억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난주 안상헌의 책 ‘경영학보다는 소설에서 배워라’를 마주하면서 정신과 의사 탬킨 박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2. 탬킨 박사는 사회에서도 가정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좌절에 빠져있는 윌헬름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자네에게 ‘바로 지금, 바로 지금’이란 말을 되풀이해서 말하게. ‘나는 어디에 있나?’, ‘바로 여기.’, ‘시간은 언제인가?’, ‘바로 지금.’ 사물이나 사람을 하나 지정하란 말이야. 아무 것이나 괜찮아. ‘바로 지금 나는 사람을 본다.’ ‘바로 지금 나는 남자를 본다.’ ‘바로 지금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를 본다.’ 나를 예로 들어보지. 마음이 산란해지면 안 돼. ‘바로 지금 나는 갈색 정장을 입은 남자를 본다. 바로 지금 나는 코르덴 셔츠를 본다.’ 한 번에 한 가지씩 예를 들어 자네 마음의 범위를 좁혀 가 보게나. 상상력을 앞세우면 안 되네. 현재 속에 있어봐. 이 시간을, 이 순간을, 이 시점을 봐.”

 

3. 나도 나이를 먹어가는구나 싶다. 예전에 탬킨 박사의 충고를 읽었을 때는 ‘이거 뭐냐ㅋㅋㅋ’ 하고 넘어간 것을, 요즘엔 ‘진짜?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뭐랄까. 명작 속에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가 단순한 허구가 아닌 의미 있는 삶의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소설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들을 실제의 나에게 비춰보게 된다.

 

4. 그래서 나도 ‘바로 지금’이라는 말을 되풀이 해보았다. 이번주는 필라델피아filadelfia에서 본의 아니게 자전거를 정말 많이 탔다. 예전 같았으면 하릴없이 페달을 밟아가며 온갖 잡생각을 했을 것이다. 안전사고가 나지 않는 최소한의 주의를 남겨두고 말이다. 하지만 템플 박사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나는 ‘바로 지금’을 계속적으로 되뇌었다.

 

5. ‘바로 지금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있다.’ ‘바로 지금 나는 페달을 천천히 밟고 있다.’ ‘바로 지금 나는 전봇대의 아랫부분을 바라보고 있다.’ ‘바로 지금 나는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아저씨의 구릿빛 얼굴을 본다.’ ‘바로 지금 나는 자전거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다.’ ......

 

6. 나에게 자전거란 사람이 걸어가기는 조금 힘든 거리를 나름 쾌적하게 운반해주는 수단에 불과했었다. 고로 자전거를 탈 때면 언제나 가만히 멍~ 때리고 있던지, 떠나버린 과거를 후회하고 섭섭했던 일들을 생각하던지, 오늘 꼭 해야 할 일들을 점검하고 움직여야 할 동선을 생각해보던지, 괜한 미래를 상상해보며 불안해하던지, 무언가 강박적으로 나의 머리는 멀티태스킹을 실시하고 있었다. 시간은 금이라고 하는데, 교통수단에 내 모든 정신을 집중할 수는 없지 않은가?

 

7. 하지만 ‘바로 지금’을 되뇌며 자전거를 타니, 뭔가 나의 삶이 자전거를 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단순히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었고(바로 지금 나는 자전거를 타고 있기에), 그렇기에 그 순간 자전거를 재밌고 잘 타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나는 삶의 충일감을 느꼈고, 허리를 앞으로 숙이고 페달을 죽어라 밟아대는 노동을 그만 두었다. 후에 나는 허리를 곧게 세웠고 시선은 앞을 직시하며, 마치 빈폴CF의 주인공처럼 자전거를 재미나게 탈 수 있었다.

 

8. 자기계발서를 탐욕적으로 읽었던 적이 있다. 많은 저자들은 현재에 집중한다면 최고의 성과뿐만 아니라 행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교훈을 전달하는 대표적인 책은 스펜서 존슨의 ‘The Present'일 것이다. 현재가 바로 선물이라고 제목에서부터 알려주지 않는가. 활자를 읽을 때는 깨닫지 못했었는데, ‘바로 지금’을 되뇌며 내 삶 속에 적용해보니 현재가 선사하는 삶의 충만감은 나를 확실히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스펜서존슨, 선물The Present

 

9. 나의 대학시절은 과거에 대한 얽매임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겹겹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숭실대학교 전산원에 틀어박혀 현재만을 집중하며 행복하게 책 한 권을 개발한 적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책의 제목 역시 바로 '선물The Present'라는 것이다.(아쉽게도 출판에는 실패했다!) 나를 잠깐이나마 현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 출판파트너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부디 건투를 비는 바이다.

 

10. 템플 박사의 ‘바로 지금’ 방법은 행복에 확실한 효험이 있다. 오늘 필라델피아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약 한 시간 반은 기다린 것 같다. 나사NASA버스의 나사가 빠져버렸는지 좀처럼 버스가 오지 않았지만, ‘바로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니 나는 그냥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10,000과라니 싸구려 햄버거를 먹어도, ‘바로 지금 나는 햄버거를 먹고 있다.’ ‘바로 지금 나는 특별히 계란 부분의 맛을 보고 있다.’ 생각하면 어쨌든 맛없는 햄버거에 집중하게 된다. 짜고 맛없다며 짜증스럽게 목구멍 뒤로 넘겨버리는 것보단 확실히 행복하다.

 

11. 아, 이래서 까르페디엠 까르페디엠 하는구나.

현재를 즐겨라,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13. 음, 뭐하고 있어요? '바로 지금'

비가 올랑말랑 우중충한 날씨에도 나무 밑에 쏙 들어가버린 아가들. 부럽부럽.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