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4. 14:51ㆍKOICA 해외봉사활동/상상하고, 추억하며 2013
지난주 우연히 나의 2011년 사진들을 열어보았다. 스마트폰을 정리하면서 모바일 상에 저장시켜 놓은 사진들을 우연히 찾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사진을 많이 찍는 편도 아니었고, 스마트폰으로 찍은 스냅 샷들이 대부분인지라 사진의 양과 질 모두 형편이 없었다. 하지만 사진들을 살펴보며 나는 웃기도 했고, 착잡하기도 했으며, 아이들이 그립기도 했다.
1. 피부의 질감과 색깔의 중요성
말을 해서 무엇하리. 아래 사진은 2011년 9월~10월쯤 아이들과 찍은 사진인 것 같다. 원래 내 피부가 아싸리 하얬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은 정말 현지인들에게 인정받는 시커먼스가 되었다. 피부엔 또 여드름이니 뭐니 뭐가 이렇게 많이 자라는지 아주 풍년이다.
2. 참 넉넉하지 못했다.
내가 담임으로 가르쳤던 아이들은 착했다. 좀 까불다가도 내가 ‘꽥’ 소리 내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는 순수한 놈들이었다. 딱 한 녀석 빼고 말이지. 평소에도 계속 말썽을 부리더니 결국 다른 선생님께 욕지걸이를 해댔다. 화내고 소리 지르는 것도 귀찮아 앞에다가 앉혀놓고 아이들과 한 시간 동안 학급법원을 운영해봤다. 그 놈은 원고, 아이들은 피고 및 배심원, 나는 사회자.
그 때 생각해보면 나름 일을 민주적(?)으로 처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칠판에 기록한 내용을 보니 참 선생으로서 난 참 지질했구나 싶다. 엄마 없이 야인으로 자란 놈이 제도적인 학교에서 얼마나 지루했을꼬. 한겨울에도 맨발로 다니는 녀석. 단 한 번도 제시간에 등교하지 않는 녀석을 ‘수업시간에 장난쳤다’, ‘교과서가 없다’, ‘책상에 앉았다’라는 이유까지 포함해서 아이들 앞에서 공개사냥을 해버렸으니 말이다.
미안하다. 선생이 참 넉넉하지 못했다.
3. 나는 초등학생을 가르치기엔 너무 지루하다.
초등학교 교사는 팔방미인(八方美人)이어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도저히 재주가 없다. 그림을 그리라면 아직까지 기저선을 먼저 쭉 그리고 본다. 기저선 위의 삼각형 두 개는 산이요, 아래 빈 공간은 광활한 바다가 된다. 그 곳에 살고 있는 졸라맨은 풍수지리적으로 최고의 명당인 배산임수에 살고 있는 거다. 그렇다고 내가 피아노, 기타를 잘 연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춤도 출 줄도 모르고, 요리도 잘 못한다.
나는 현상을 읽고 분석하고 통찰해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초등학생들에게 이런 것들을 요구할 수 없진 않은가? 내 수업 준비는 어쨌든 그래서 간단하다. 내 멋있는 목소리와 교과서, 그리고 하얀색, 파란색, 빨간색 분필! 아주 분석적이고 구조적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무슨 대학교도 고시학원도 아닌데 아이들한테 미안한 마음이다. 얼마나 지루할꼬. 요즘은 파라과이에서 멜로디언 음악수업을 하는데, 먼저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오선악보, 높은음자리표, 음계. 역시 엄청나게 지루해하더라. 대다수가 집중도 못하고 재미도 없어하고. 심지어 소리 내면서 하품하는 여자 아이도 있었다. 나 외국인인데 말이지.
4. 글로 아이들과 진심을 소통하기
나는 말에 굉장히 약하다. 진지하게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백치 아다다가 되어 버린다. 아다다 아다다다 말을 더듬다가 끝나 버리지.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편지를 많이 써주었다. 글이 조악할지언정 그래도 곰곰이 생각한 후에 쓸 수 있고, 썼다가 아니다 싶음 지울 수도 있으니 나에게는 딱 맞는 소통 매체인 셈이다.
그리고 가끔 인상 깊은 답장을 받기도 했다. 이쁜이들 몇몇이 모여서 러브 엑츄얼리Love actually의 한 장면처럼 스케치북에 메시지를 적어 넘겨 보여주기도 했다. 모바일에 저장된 사진이 아래사진 하나뿐이어서 아쉽다. 학교에서 큰 소리로 나의 성(性) 기능에 문제가 있다고 마구 소리치며 다니는 등치 큰 아이었는데, 의미 있는 답장을 받아 기분 좋아 찍었던 것 같다.
예린아 천국은 그렇게 가는게 아니다.
심하게 꾸중들을 때도 짝다리 짚고 건방진 자세를 유지하셨던 녀석도 내가 학교를 떠날 때는 편지 한통을 들고 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생각해보면 아이들에게 글쓰기 이외의 숙제를 내준 적도 없었다. 대신 하루에 자유글쓰기 형식으로 15줄을 꼭 써왔어야 했다. 아무런 평가 기준도 없이 내가 읽어보고 크크크 재미있으면 칭찬 받는 어이없는 시스템으로. 재미 붙인 애들은 희곡도 썼고 소설도 써왔다. 반 아이들의 장점도 나열해보고, 뒷담화도 늘어놓았다. 너무 재미있었다 이건.
이건 파라과이에서 사진으로나마 받은 스승의 날 편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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