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18. 13:44ㆍKOICA 해외봉사활동/상상하고, 추억하며 2013
1. 오늘부터 음악시간에 진짜 멜로디언을 등장시켰다. 그동안은 기초음악이론이라고 오선악보에 높은음자리표와 스케일만을 그리도록 연습시켰다. “너희들 먼저 기본적인 음악이론을 이해하지 못하면, 멜로디언 연주는 절대 불가능해!” 아이들이 잘 따라오지 못하고, 집중력을 잃을 때마다 이렇게 다그쳤지만, 나 스스로 지루함을 못 참고 “남자들아, 멜로디언 가져와라!” 외쳐 버렸던 것이다. 될대로 되겠지 하면서.
이놈은 진짜 착한놈이구요
이놈은 진짜 나쁜놈입니다.
2. 바람직한 연주 자세를 알려준 후, 피아노 바이엘의 아이디어를 따라서 손가락에 번호를 붙여 연습을 시작했다. (음악수업내용을 차근차근 가이드해주는 파라과리 김소리 단원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오늘의 미션은 ‘도레도레 도---’ 딱 하나! 손가락 번호로는 ‘1212 1---’가 되겠고 스페인어로는 ‘uno우노 dos도스 uno우노 dos도스, unoooo 우노오오오’가 되시겠다.
3. 엄지와 검지를 번갈아가며 건반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동작을 아이들은 잘 따라했다. 하지만 어려웠던 점은 ‘기준’이 되는 ‘도’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앞에서 백날 이 건반이 ‘도’라고 설명하는 것은 아무래도 소용이 없기에, 나는 일일이 또 돌아다니며 여기가 ‘도’라고 수십 번을 말해주어야 했다. 그래도 결국 아이들은 ‘시도시도 시---’ 또는 ‘레미레미 레---’를 연주한 후, 깔깔거리며 재밌어했다.
4.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기준이 되는 ‘도’에 빨간 스티커를 붙이기로 한 것이다. ‘엄지손가락을 빨간 스티커 위에 올려놓으세요!’ 설명하자 제법 연습하기가 수월해졌다. ‘흐흐, 내가 이정도란 말이지!’ 생각하며 자부심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멜로디언 안에 들어있는 한국 스티커를 사용한 걸 보면, 이게 순수한 내 아이디어만은 아닐 텐데 말이다.
오늘 가르친 수업 내용과 함께 마리아Maria
멜로디언 투입, 불지 말래두 계속 불어댄다.
5. 나 역시 피아노를 처음 배울 때에는 ‘도’를 찾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피아노에 처음 앉아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기억이 많았던 걸 보면 말이다. 나는 항상 먼저 피아노 ‘열쇠구멍’을 찾아야 했고, 그리고 나서야 나의 오른손을 제대로 피아노 위에 올려 둘 수가 있었다. 오늘 나는 열쇠구멍을 빨갛게 색칠해서 멜로디언에 붙인 것이다.
6. 삶에도 멜로디언에 붙여놓은 빨간 스티커, 피아노의 열쇠구멍 같은 것들이 분명히 있다. 생각과 행동의 올바른 기준이 되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잘 해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들 말이다. 만약에 없다면 정말 답답한 일이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넣고 힘껏 돌렸는데도 돌아가지 않았던 우리 집 대문처럼 말이다.
나의 망치질이 효과가 있던걸까? 요즘은 문이 잘 작동한다. 그래서 교체 안하고 그냥 저러고 산다.
7. 요 며칠간은 내 파라과이 라이프의 슬럼프였다. 아무 일도 없는데도 항상 이만큼 짜증나있는 내 모습이 싫었다. 슬럼프를 극복하고자 나는 오히려 수업일정을 더욱 팽팽하게 늘렸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께 학교도서관을 만들자고 제의하고, 교사설명회도 좋은 반응으로 마쳤다.
8. 하지만 일을 하니깐 하는 것이지 근심걱정만 한 가득이었다. 음악수업에 참여하는 학급의 수를 늘릴지 말지, 수업시수 역시 늘릴지 말지, 도서관을 하면 돈은 어디서 굴러 들어올지, 학교와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 책은 어떻게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지, 책을 비치할 가구들은 어디서 어떻게 마련할지......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 도대체 속 시원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에 답답하고 불안했다.
9. 그래서 기도했다. 내가 일을 잘 운영해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 해달라고. 나를 혼자 두지 마시고, 요셉처럼, 여호수아처럼, 다니엘처럼 나와 ‘함께’ ‘동행’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그리고 짱구를 돌려가며 모든 가능성과 대안을 검토한다. 하지만 항상 내 생각보다 쉽고 친절하게 문제 하나하나를 풀어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걸 말이다. Dios, 저는 contigo nomas 입니다. :)
10. 얼마 전에 비가 많이 내렸다. 진흙탕에 쫄딱 젖은 내 신발을 깨끗이 빨고 햇빛에 바짝 말렸다. 그리고 하릴없이 음악을 틀고 신발 끈을 매려는데 괜스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탁한 신발에 신발 끈을 끼워 넣는 일을 직접 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학교에 다녀오면 항상 아빠가 해두었었고, 등교가 늦어서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는 아침엔 엄마가 해주었던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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