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6. 05:58ㆍKOICA 해외봉사활동/상상하고, 추억하며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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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허리에 커다란 파스 3개를 동시에 붙였더니 몸 전체가 후끈 달아오르는 기분이다.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꼭꼭 오랫동안 등허리를 밟아준다면 좋겠다. 이년 동안 마실 차코 먼지를 이틀 동안 다 마셨는가보다. 목이 영 칼칼하다. 이른 아침 내 목소리는 약간 섹시하기까지 하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 아주 가끔씩은 내 바지 뒷주머니에 목장갑이 꽂혀 있었다. ‘내가 고생하는 걸 보여줘야지!’하고 목장갑의 빨간색 꺼끌꺼끌한 부분을 바깥으로 내놓고 다녔더니(약간 패셔너블했을 수도 있다.), 아이들은 내가 불쌍하다고 했다. 누구 제자 아니랄까봐 참 센스가 넘치는 아이들이다. 파라과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목장갑은 없었지만, 앞머리를 산뜻하게 상투 튼 후에 이틀 동안 도서관에서 나는 막일을 진행했다.
일하던 목장갑으로 사진찍어 페북에 올리고 그랬다. 힘들었다지만 그만큼 여유있었다.
짬내서 일했던 학교 창고. 애들 가르치려고 힘들게 공부했더니만, 추운 겨울 창고에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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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 기관의 도서관에는 깔끔한 책장도 몇 개 있고, 수십 년 간 학교에 전달된 교과서류의 책들이 차곡차곡 묶여 정리되어 있기에 확실히 도서관이라 이름 지어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도서관은 내가 가끔 한글로 된 책을 읽다가 엎드려 잠이 들고, 그러다보면 술마Zulma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치고 있고,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면 파티마Fatima선생님이 농담을 하고, 우히히 웃다가 떼레레 한잔 받아 마시며 퇴근할 준비를 하는 공간이다.
도서관의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기능은 파라과이 정부에서 학교에 보내는 음식물들을 저장하는 공간이다. 무려 도서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간이 바로 내가 실제 읽을 만한 책을 가지고 꾸려나갈 도서관으로 사용할 공간, 즉 내가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음식물을 둘만한 다른 적당한 곳 없을까?” “없어. 창고가 하나 있긴 한데 거긴 쥐도 너무 많고…”
고민하다가 방법을 생각했다. 사실상 도서관을 절반으로 나누고 있는 책장들을 옮겨야겠다. 기다란 책장들은 도서관의 정중앙을 가로질렀고, 그 때 만들어지는 여백이 바로 음식물을 보관하는 장소로 들어가는 조그만 입구였다. 그리고 그곳에 나는 책을 비치해야 했는데,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서관에 들어서는 학생의 시야를 반드시 확보하고 싶었고, 책장들을 잘 구조화해서 그 사이에 음식물들을 죄다 짱박아두고 싶었다.
음식물이 있는 도서관의 절반 공간! 그나마 저번주 하루를 온전히 막일에 투자해서 그 절반이라도 이렇게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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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목요일에 일을 시작했다. 나보다 몸집이 두 배인 파티마Fatima선생님과 몸집이 무려 세 배인 술마Zulma선생님이 도와주시기로 했다. (아, 정말 술마의 힘은 대단했다!) 조그만 책장 하나를 밀어서 옮겼다.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이 책장 하나만 옮기기로 합의 봤었지만, 나는 눈치를 보며 물어보았다. “우리 이 기다란 책장도 옮기면 안 될까?” “어디로?” “여기로.” “좋아, 옮겨보자” 하고 기다란 책장에 있는 책을 마구 빼냈다. 적어도 십년은 바깥 공기를 마셔보지 못한 책들이 너무도 많아 그냥 끌 수가 없었다.
헉! 옮겼는데도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눈치를 보며 다시 물어보았다. “저기 다른 책장을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잘 모르겠어.” 이렇게 저렇게 옮겨보아도 딱 떨어지는 해답이 안 나와 나는 계속 생각만 하면서 망설였다. 그때 갑자기 두 분 선생님이 과라니로 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딱 합의를 보시고 설명해주신다. “이 책장을 앞으로 확 당기고, 저건 벽으로 확 붙이고…” 아무래도 좋은 해답일 것 같지 않다. “그래서? 해결이 안 되잖아.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하며 우물쭈물 하는데, 내가 힘들다고 투정하는 걸로 받아들였는지 “우리 과라니들은 이렇게 일해! 하루 시작하면 반드시 그 날 끝을 봐야해!” 하신다. 나참, 한국인이 현지인에게 일하는 방법에 대해 충고도 받는구나 하면서 일단 하자는 대로 해보기로 했다.
골 때린 것은 일 시작 이후부터는 다시 주도권이 나에게 넘어왔다는 사실이다. 당신들이 결정해놓고 나보고 지휘하란다. 원래부터 반대한 계획이었지만, 책장을 붙여 동그란 동굴처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림까지 그려주며 설명해주었다. 목요일은 그렇게 계획을 공유하고 책장 하나를 앞으로 쭉 빼는 것까지 해서 일을 마쳤다.
맘에 안든다고!! 내일 투비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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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아침은 음식물들을 한 곳에 잘 모아놓고, 책장을 구조화하는데 집중했다. 그런 와중에 버릴 건 버려야했고, 다른 책장으로 옮겨야 할 건 옮겨야했다. 그래도 내가 남자라고 제일 앞장서서 'UN DOS TRES!(하나 둘 셋!)' 외치면서 일을 했다. 하지만 하나 둘 셋을 외쳐도, 움직이지 않는 책장 때문에 쪼그려 앉은 나만 엉덩방아를 찧을 때가 너무 많았다. 다같이 많이들 웃었다.
금요일 오후는 힘들었다. 가장 힘센 우리 술마선생님이 아프고 어지럽단다. 그리고 미겔라Miguela선생님이 아프셔서 출근을 못했기에 보충수업을 들어가야만 했다. 술마의 전력이탈로 나와 파티마만 남았다. 파티마는 농담은 잘하지만, 술마의 완력은 없다. 그래도 일단 둘이서 음식물들을 잘 만들어놓은 책장 동굴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고맙게도 학교에서 요리로 봉사하시는 학부모 두 분이 도와주시겠다고 찾아왔다.
제일 무거운 것은 쌀과 제르바였다. 그런데 이 학부모님들 힘이 넘쳐나시는지 쌀과 제르바를 번쩍번쩍 들어 나에게 패스해주시는 것 아닌가. 나는 어제부터 일해서 남아있는 힘이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말했다. “아주머니, 스스르요. 제발 스르르요.” (스르르syryry는 과라니어로, 허리를 사용하여 물건을 들지 않고 바닥에 질질 끌면서 이동시킬 때 사용한다. 한국말과 비슷해서 기억하기가 쉬웠다.) 아주머니들이 웃으시면서 아주 잘 알아들으셔서 다행이고 유쾌해지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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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과 음식물을 모두 옮기자 그래도 내가 원하는 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오는 학생들의 시야도 확보할 수 있기에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노가다 장長으로서 이틀 동안 각종 과자와 탄산음료를 제공하느라 돈도 꽤나 썼다. 하지만 고생한다고 집에서 빵을 싸다주신 선생님도 계셨기에 좋았다. 이틀 동안 보고 먹은 먼지의 양은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모든 차코의 거미araña를 관찰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월요일에는 출근을 조금 늦게 할 생각이다. 혹시 나 없을 때 물청소를 완료해놓았을지도 모르니!
나름 만족만족! 이제 커튼만 만들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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