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의 힘

2014. 5. 22. 10:42KOICA 해외봉사활동/파라과이, 대한민국 2014

  가족발표회를 잘 마쳤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학생들 가족들이 생각만큼 와줬고, 발표회도 꼭 생각했던 대로 진행됐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렇게나 긴장할 줄은 몰랐다. 잔뜩 위축돼서 손이 가는대로 건반을 누르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생각보다 가족발표회의 반응이 좋았다. 나는 동네 사람들과 하기 싫은 뽀뽀 인사를 해야만 했다. 학부모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간식을 마련해 주었다.

가족발표회를 마치고 아이들과


  발표회를 마치고 몇 일간은 집에서 푹 쉬었다. 아이들과 발표회를 준비했던 두 달간의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갔다. 발표회 당일도 아침부터 분주했다. 그러다가 집에서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자니 어찌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지… 사무소가 일하지 않는 단원 나를 당장이라도 처벌할 것 같았고,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는 것만 같아 양심이 콕콕 찔렸다. 앞으로 남은 두 달을 무얼 하며 지낼까 고민했다. 그리고 샤워를 하다가,

  ‘책을 써봐야겠다.’ 생각했다.


  이전부터 책 쓰기에는 관심이 많았다. 출판 욕심은 내 대학 시절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했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직접 쓴 학습 원고를 들고 까불거리며 여러 출판사를 찾아다녔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직접 출판사를 차려보겠다고 설쳤지만 결국 런칭도 못해보고 끝이 났다. 문학가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책을 출판한 사람은 결국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코이카 경험을 담아 책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수기만을 담고 싶지는 않았다. 책에 담을만한 알찬 내용도 모자랄 것 같고, 기존 평범한 수기집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파라과이에서 활동하는 여러 단원들을 방문하여 인터뷰한 후, 그들의 활동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소화하여 담아내고자 했다. 책의 컨셉은 내 출판자문단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많이 변화했다. 코이카 봉사단원들이 파라과이에서 실천한 교육활동들을 세부적으로 나눠 목차를 만들고, 각 목차에 해당하는 활동을 진행한 단원들의 이야기를 담는 형식으로 확정했다. (Gracias a 출판자문단 Nora, Hoirim, Sori, Hyewon)


  프롤로그를 쓰고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썼다. 지지난 여름방학에 진행했던 성인문해교육에 관한 내용을 빠르게 써내려갔다. 아주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글은 계속적인 수정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럭저럭 봐 줄만은 했다. 하지만 남의 이야기를 마치 내가 실제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풀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현장감이 있으려면 이야기 하나하나를 개연성 있게 깨알같이 써줘야 하는데, 남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처럼 필요할 때마다 경험을 회상하여 되살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소설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결과물이 형편없었고 자문단 역시 혹평했다.

  옆 동네 종환이를 인터뷰하기 전에 운동장을 돌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책 쓰기를 다시 한 번 포기했다. 내가 너무 쉽게 가려고만 한 것 같았다. 코이카의 출판지원을 맹신한 까닭이었다. 내 책을 출판하기 위해선 첫 발행부수를 모두 판매하는 것이 중요한데, 코이카가 이와 관련해서 경제적 지원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 기회를 경험삼아 일찍 내 책을 갖자, 그렇다면 앞으로 책을 쓸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의미 있는 책을 내보고자 하는 욕심은 처음부터 없었다.

  물론 생각이 야비하다 하여 비난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경험은 언제나 소중하므로, 그리고 언제나 첫 술로는 배부르지 않기에. 하지만 수많은 토론 끝에 얻어진 책의 컨셉은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는 남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관찰해서 옮겨내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책들의 저자도 다들 본인의 목소리를 냈다. 대담집 종류는 거의 읽어본 적도 없었다. 결국 출판 욕심 때문에 나 자신을 속여 가며 아등바등 노력하는 내 모습이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 스타일을 고려하자면, 평범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풀어놓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야 했다. 방향을 제대로 잡아 일을 다시금 진행해볼까도 싶었다. 하지만 좀 더 암팡지게 일할걸, 좀 더 끈기 있게 블로그 포스팅을 해볼걸, 후회할 뿐이었다. 이번에 시도해보니 책 쓰기가 별게 아니었다. 목적의식을 갖고, 매일 일정 분량을 꾸준하게만 책이 완성된다. 300쪽 분량의 책은 워드프로세서에서 150쪽이다. 매일 2쪽씩만 써내려간다면 두 달 반이면 책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차곡차곡의 파워를 다시 한 번 느낀다. 꾸준함을 숙성시켜주는 시간의 힘!

  문장공부는 앞으로 차곡차곡 해나갈 예정이다. 한국의 빼어난 단편소설 50편으로 문장내공을 만들고, 한국에 돌아가면 신문 논설위원의 칼럼들도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느낌으로 베껴 써 볼 예정이다. 추가적인 공부의 필요성도 느낀다. 아직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지식과 경험, 그리고 문장력을 갖추고 있다면 책 쓰기가 어렵지 않겠다는 판단이다. 또 한 번의 실패에서 어떻게 이런 긍정적인 교훈을 뽑아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책을 씀으로 전문가가 되고 싶고, 전문가가 됨으로 책을 쓰고 싶다. 글로써 대중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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