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29. 12:52ㆍKOICA 해외봉사활동/사랑하고, 살아가며 2012
1. 우리집에서 학교까지는 약 4km 떨어져있다. 많은 경우 밀씨아데르 선생님의 빨간 차를 타고 출근하지만, 매일매일 얻어타기란 쉽지 않다.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는 꼭 얻어타는 걸 실패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퇴근길은 남을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못된 성격으로 인해 매일 걸어서 퇴근한다. 발걸음은 점점 빨라진다. 처음에는 1시간을 걸어야 도착했는데, 요즘엔 40분이면 충분하다.
2. 출퇴근길은 고난길이다. 수업때문에 컴퓨터, 카메라, 아이패드 다 짊어지고 걸어가는 날은 피난길이다. 선글라스를 써도 밝게 보이는 남미의 태양과 동행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특별히 모래바람이 좀 불어주는 날이면 가다가 뒤돌아서다 가다가 뒤돌아서기를 반복한다.
출퇴근길.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3. 하지만 무엇보다도 걸어서 출퇴근은 가장 힘든 점은 외롭다는 것이다. 아무도 걸어다니지 않는다. 나 혼자 걸을 뿐이다. 그래서 외롭기도 하고 심술이 나기도 한다. 모두들 오토바이를 타고 슝슝 달려가고 달려온다. 나는 특별히 달려오는 오토바이 무리들을 주목한다. 그냥 평범히 걷는 척하다가 이들이 내 뒤로 가까이 왔을 때, 얼른 몸을 돌려 팔로 운전자를 깨끗하게 낚아채고 오토바이를 강탈해내는 모습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묘사하자면, 팔에 힘을 뺀 채로 약간 구부려 허리의 힘을 사용해서 가볍고, 다치지 않게 끝내야 한다.
그 날, 성공적으로 오토바이 운전자를 낚아채기 위해서라도 내 몸을 갈고 닦아야겠다.
3. 하지만 그래도 좀 살았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멈춰서는 오토바이들이 제법 많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들의 이름도 모르지만, 그들은 내 이름도 알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안다. 어쨌든 나도 아는척, 반가운척 가득하고 Vamos!(갑시다!)를 연신 외친다. 게중에 나를 Fernando(현웅이형, 선임단원)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Fernando! 하면 Si(네)하고, 또 Vamos!를 외치면 될 일이다.
4. 나는 참 나쁜 놈이다. 나도 내가 착한 놈이고 배려 많은 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나름 노력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꼭 나쁜 생각들을 한다. 몇 일 전의 일이다. 구스타보 선생님과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그리고 오토바이가 좌우로 많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퀴에 펑크가 난 것이다. 그 때 내 생각이, '아, 뛰어 내릴까, 이정도 속도면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고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이었다. 내가 만약 뛰어내렸으면 날 태워줬던 그 선생님은 적어도 크게 넘어졌을 거다. 결국 중심을 잘 잡아내서 아무도 다치진 않았지만, 참 내가 나쁘다는 생각을 했다.
5. 그 날 많이 웃었다. 하마터면 머리터지고 팔뚝 다 까질뻔했다고... 그 일이 있은 후, 삼사일이 지났을까. 혼자서 피곤함에 쩔어 퇴근하고 있었는데, 뒤돌아 보니 그 선생님이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하고 있었다. '오예!' 오늘 걷는 일은 끝났구나 생각하며 다시 걸었다. 아는 사람이고, 나도 전에 많이 도와준 적이 있어 특별히 오토바이를 잡으려고 손을 흔들진 않았다. 그냥 묵묵히 걸어가면 알아서 오토바이 설 줄 알았는데, 그냥 지나쳐가버렸다.
6. 나쁜놈... 을 연신 외쳤고, 그 다음날도 속으로 꿍해져 있었다. 나는 예전에 부탁 받은 보충수업도 해주었고, 컴퓨터 관련 업무들도 도와주었다. 그런데 같은 길 가는 사람 등뒤에 태워주는게 뭘 그렇게 어려운가. 그래, 날 그정도밖에 존중하지 않는거겠지... 그리고 그 날, 그 선생님의 부인과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선생님의 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남편이 날 태워주는걸 약간 걱정하고, 두려워한다고. 내가 다치는걸 무서워한다고. 그렇다면 그때, 오토바이 멈춰서 걱정된다고, 미안하다고 이 두 마디만 하고 슝 떠나도 됐을걸, 나는 결국 또 나쁜놈이 되었다.
7. 나쁜놈은 오늘 집에 전화를 했다. 아빠는 주일저녁에 온 가족이 모여있으니, 내가 많이 보고싶었다고 말했다. 나도 아빠가 보고싶다. 그리고 어렸을 때, 아빠가 우리 삼형제를 모두 함께 태우고, 학교로 데려다주기 위해 힘껏 페달을 밟았던 그 자전거도 이제와서 그립다.
이놈들, 부럽다. 좋다, 이런 풍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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