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마리스깔의 사진사.

2012. 10. 31. 12:38KOICA 해외봉사활동/사랑하고, 살아가며 2012

1. 나는 마리스깔의 사진사다.

 

2. 파라과이로 건너오기 몇일 전에 회림이의 도움을 받아 DSLR을 장만했다. 중고 직거래로, 캐논의 오래전 보급기 모델인 400D. 사실 동기들끼리 위험해서 DSLR을 들고 다닐 수 없단 말이 많아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래도 이때 아니면 나같은 문화적 촌놈이 언제 큰 카메라 만져보나 해서 결국엔 하나 챙겨넣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고로 잘한 일이다.

 

3. 책 한권으로 카메라 공부하면서 찍어보자 했는데, 아직까지 책은 펼쳐보지도 않았다. 주로 아이들이라는 훌륭한 피사체들을 찍다보니, 내 수준에서는 만족할 만한 사진들을 얻는다. 이 곳 사람들은 사진 찍는 것을 참 즐긴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 보면, 어른들도 아이들도 saca foto! (사진찍어줘!)를 나에게 외쳐준다. 처음엔 좋다고 다들 찍어줬지만, 지금은 모른척할 때도 사실 많다. 나는 언제나 스페인어가 부족한 외국인이니까 :)

 

4. 사진 덕분에 초반 임지 적응이 쉬웠던 것 같다. 이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큰 카메라로 이사람 저사람 찍어주니 서로 좋았던 것 같고, 사진사로 학교 각종 행사에 꼭 불려다녔다. 반강제로 불려다니면서 여러 사람 만나기도 하고, 학교와 마을 분위기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찍은 사진들을 인화해서 판매하는 '사진 판매' 사업도 물려받아서 나름 잘 운영하고 있다. 한장에 무려 4,000과라니씩 받는다. 장난으로 찍을때마다, '찰칵, 꽈드로밀! 찰칵, 오초밀!......' 하기도 한다. 

학교 내 사진판매사업

 

5. 오늘은 유치원 졸업식이 있었다. 어김없이 사진사로 아침 8시까지 소환당했다. 뜨랑낄로를 이기는 한국인의 뜨랑낄로함으로 20분정도 늦게 도착하니,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도착했다. 애국가도 부르고, 이사람 저사람 나와서 기나긴 연설을 늘어놓은 후, 아이들의 성경 속 아기 예수님 탄생 장면을 재연하는 무언극을 했다. 그리고 나서 졸업장 수여! 졸업장은 나와 인연이 깊다. 내가 제작하게 되었는데, 거의 다 완성하면 계속해서 내용을 수정해대서 조금 화가 났다. 

다소 쿨한 자세를 취한 요셉.

목자들은 먼 곳에서 와서 아주 피곤한 모양이다. 이 더운 날에 이런 공연을 보다니!!

 내가 만든 Certificado. 자꾸자꾸 말바꿔서 정말 짜증났다. 그래도 졸업식 때 보니 아주 뿌듯!

 

6. 모든 차례가 끝나자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들었다. 사진 찍어달라고... 사진 전문가가 보면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상황일게다. 하지만 나는 사진들을 팔아 돈을 벌자는 '상업적 마인드'로 언제나 흔쾌히 'Si'(네)라고 말하고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아마추어는 역시 질보다 양이기 때문에, 한 장의 사진을 건지기 위해서 한장면에 평균 5방의 셔터는 누른다. 4개월이 된 시점, 마을 사람들도 나의 '셔터 막누름'에 적응이 된 듯하다. 그리고 이 '셔터 막누름'의 간지 덕분에 나는 마을 내 사진 전문가의 반열로 오를 수 있었다.

 

7. 평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늘은 사람들이 무려 '줄'을 섰다. 아무래도 가족들이랑 함께 찍어서인지, 6-7가정이 찍어달라고 달라붙자 줄이 형성되었다. 영광이다. 좋은 마음으로 흔들리지만 않도록 잘 찍어줘야지 마음먹었다. 내가 살면서 사진으로 언제 이런 호사를 누려보겠는가.

 

8. 오늘은 수업 중에도 어느 학부모가 들어와서는 사진 좀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 같았으면, 수업 중이시니 나가서 기다려 달라고 조금은 단호하게 말씀드리겠지만, 이 곳에서는 수업의 고상함따위는 없다. '응? 지금?' 하고 같이 있는 선생님의 눈치를 보자,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diez mill'(10,000과라니)라고 소리쳐주셨다. 원래는 사진을 인화해서 4,000과라니에 판매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10,000과라니를 받으라는 브로마(농담)의 화신 파티마선생님의 말씀! 큭큭. 

 

9. 이 곳의 아이들은 정말 좋은 피사체이지만, 어른들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실컷 본인이 찍어달라고 했으면 사진 찍는 성의가 있어야 하는데, 항상 다른 머나먼 곳을 바라보고 계신다. '벤샤 미'(여기보세요), '에뿌까 미'(웃어보세요)를 아무리 과라니어로 외쳐대도 연신 굳은 얼굴에 먼 곳을 응시하신다.  

아주머니의 시선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다. 여기 보시라구요! 

 

10. 처음에는 봉사자로서 사진을 판매하고, 돈을 직접적으로 만진다는게 과연 옳은 일일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쁘게 나온 딸내미 사진을 사면서 행복해하는 어떤 아줌마를 바라보면서, 나는 지금 단순히 사진만 파는게 아니라 생각했다. 추억을 팔고, 행복을 판다고 해야 될까? 아무튼 구입하는 사람, 판매하는 사람 모두 흐뭇하게 기분 좋아지는 그런 장사는 세상에 몇 개 없을 게다. 아무튼 굿!

 

11. 그렇다면 오늘 유치원 졸업식의 베스트 샷을 한번 찾아볼까?

우리 니바끌레 친구들은 언제나 매력적인 피사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