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파라과이.

2012. 11. 15. 03:15KOICA 해외봉사활동/사랑하고, 살아가며 2012

 

자네, 많이 돌아가고 싶은가? 이제 597일 남았다네. 씨에스타 포함해서 1,200번도 안자면 대한항공 기내식을 먹고 있는 자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게야. 큭큭. 아이패드 디데이 어플리케이션에서 두께를 가늠할 수 없었던 600일의 벽이 깨져 있었다. 역시 시간은 조용하면서도 빠르다. 그리고 강력하다. 집에 갈 날을 골똘히 생각해서 그런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두 개 있었다. :)

 

그 첫번째,

학교 현지인 친구가 물었다. '너 한국으로 언제 돌아가?' -> '응, 오늘 615일 남았어.' -> '너 진짜 나빴다.' -> 'ㅋㅋㅋㅋㅋㅋㅋ'

 

그 두번째,

요즘에 코이카 활동물품지원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어제 기관장 신청서를 작성하고 기관장에게 보여주며 함께 의견을 조율했다. 그런데 마지막 문서작성 일자가 '2014. 11. 15'로 적혀 있는 것이 아닌가?

교장 왈, '너 2014년만 생각하는구나' -> '아...그게...' -> '너가 날 오늘 더 슬프게 하는구나' -> 'ㅋㅋㅋㅋㅋㅋㅋ'

교장 maria concepcion. 훌륭한 이야기 상대이다.

 

그렇다, 나는 2014년만 생각한다.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잘 살아가면서도, 이상하게 2014년 8월 15일 광복절만을 생각한다. 보고 있어도 너가 그립다는 말이 이런 의미일까? :) 나는 일제강점을 직접 겪어본 사람은 아니지만, 광복절의 의미가 마음 속에 생동감있게 자리잡아 버렸다.

하지만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덕택으로 벌써 파라과이 생활이 6개월을 훅 지나버렸다. 그리고 파라과이는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한국에서였으면 시시하다고만 생각했을 것들인데, 지금와서는 이것들이 너무나도 중요한 삶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1. 집안일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 있다. 한 지붕 안에 사는 가족의 수와 집안일의 양은 정확하게 정비례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혼자 살 때, 집안일의 부담은 가장 커지게 된다는 '자취'의 법칙.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여러 사람이 밥을 먹는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 한 요리를 두고 수저를 식탁에 조금 더 올리면 된다. 청소도 마찬가지다. 혼자사는데도 이상하게 똑같이 더러워진다. 오히려 가족들과 집안일을 가족들과 분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담이 가중된다. 처음 몇 개월 동안은 학교 출근과 집안일이 내 일과의 전부였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 있다고 하지 않았는데, 열심히 먹고 설거지하고 청소하다 보면 침대에 누워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안먹고, 안마시고, 안깨끗하게 살기로 했다. 최소한의 동선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집청소는 앞으로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분명히 이정도 그래프가 나올 것이다.

그림판으로 쓱쓱 그리면서, 내가 지금 뭐를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수십번 스쳐 지나갔다.

 

2. 식사는 '향유'하기 보다는 '처리'해야 할 대상이다. 요리를 하면 집안이 더워지고, 설거지가 배로 늘어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찮다. 하지만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끼니는 거르면 안되는 것. 그래서 내 머릿속 전두엽은 식사를 '처리'하는 것으로 '리프레임'하기 시작했다. 카레를 예로 들 수 있다. 혼자 살지만 카레를 진탕 많이 해놓는다. 그리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먹기 곤란해지기 전에 한끼 한끼 카레에 밥을 쓱쓱 비벼 가볍게 처리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웬만하면 완품 위주의 식품을 구입하려고 한다. 라면, 통조림, 블럭으로 된 국... 개인적으로 스팸과 비빔면 개발자는 대한민국 국제개발협력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생각한다.

곰국 스타일의 카레

 

3. 사람들과 이야기 하면서 가볍게 미소지을 수 있다. 내가 아주아주 시크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미소 짓지는 못했었다. 느끼하지 않은가. 한국인이 김치처럼 웃어야지, 파스타처럼 웃으면 되겠나... 나는 친구들과 낄낄대며 교양없이 웃어대기만 했었다.

내가 미소짓기를 시작한 이유는 다름 아닌 못알아듣는 스페인어를 알아듣는 척하기 위해서였다. 말을 못알아듣지만 눈치껏 웃어야할 타이밍은 잘 알아차렸고, 확실히는 못알아들어 폭소를 터뜨리기는 좀 내 자신이 무안하니, 미소를 짓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서 웃어보려는 예전부터의 노력도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덕분에 현지어를 잘 못알아들어도, 어른들과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다. 그저 작은 눈을 조금 더 작게, 두꺼운 입술 끝을 45도 각도로 조금만 올려주면 된다. 음, 피클 웃음 정도 되겠다. 

이정도가 피클 웃음 되겠다. 배를 꼬집어서 조금 당황했다.

 

4. 나는 영어를 진짜 잘한다. 특히나 내 머릿속의 영어단어의 데이터베이스는 무한하다. 스페인어를 말하면서 항상 느낀다. 내가 정말 많은 영어 단어를 알고 있었구나... 오늘도 학교에 가거든 부지런히 스페인어 단어 물어보고, 다시 한번 내 영어의 위대함을 느껴야겠다. 조금은 걱정이다. 어제 항상 이해하지 못하는 스페인어를 친절히 설명해주던 학교 친구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내 인내심은 끝났어' -> '인내심을 한 달 충전하는데 얼마야?' -> '5천과라니' -> 'ㅋㅋㅋㅋㅋㅋㅋ'

 

5. 진짜 감동은 자질구레함에 있다. 예전에 시골에 가면 이해하지 못했다. 뭐할라고 김치랑 된장같은 것들을 바리바리 싸주고, 또 그걸 싸들고 오는건지. 헤어지면서 부모님이 이모님 손에 쥐어드렸던 돈 몇만원도 버스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리는 그 이상한 심리... 알지 못했는데, 그런 것들이 진짜 감동이고 진짜 고마움이다. 수경형님이 싸준 망고랑 고구마 먹으면서 깨달았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고향에 가면 고추도 싸주고, 깻잎도 싸주고 하는구나... 그리고 한가지 더, 망고와 고구마가 생각보다 비슷한 모양이라는 점 :) 조금 더 소심해지고 조금 더 자질구레할 필요가 있다. 인생은. 

 

6. 물은 참 소중하다. 식수, 그리고 짜지 않은 수돗물이 어디든지 콸콸 흘러나오는 한국에서는 몰랐다. 짠물로 씻다보니 머리카락도 조금씩 빠지고, 밥을 앉히고 국을 할때마다 수돗물을 사용하지 못해 항상 불편하고 아쉽다. 그리고 수도꼭지 없는 집에서 살고 있는 현지인들에게 물은 너무나도 소중했다. 처음에는 마중물을 넣고 펌프질하여 우물물을 끌어내는 모습을 낭만적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복에 겨워 터진 소리였다. 아, 그리고 그리고 평균 약 40도의 더위에서 건강한 성인 남성은 나는 1주일 식수로 20L를 꼭 소비한다. 그대는 일주일동안 얼마만큼의 식수를 사용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