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de in, Fade out.

2012. 11. 28. 11:22KOICA 해외봉사활동/사랑하고, 살아가며 2012

 

1. 페이스북에 포스팅이 하나 올라왔다. 다름 아닌 '해외봉사활동 체험수기 공모전' 포스터. 보고 피가 조금 끓었다. 무진장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뭘쓰지? 내가 파라과이에서 특별히 봉사한 것은 무엇이지?'에 생각이 닿자, 뭉실뭉실 피어오르는 상상의 나래는 그 날개를 접고 말았다. 하긴, 이런 체험수기에는 뭔가 따뜻하고, 감동적인 내용들이 가득 담겨있어야 하는데. 나는 기껏해야 현지인들하고 시시콜콜한 농담 주고 받는 것이 주요 일과 아니던가. 단원생활 시작한지도 얼마 안되었고.

음, 저 봉사단원은 지금 어디 나라에 있을까? 나라 옮기고 싶다 :)

 

2. 삼고초려. 무슨 일이든 3번은 튕겨줘야 한다. 그리고 나서 관리요원님의 체험수기 공모전 전체안내메일을 받았다. 단체메일이니깐 가볍게 패스! 그리고 국내휴가 앞두고 글쓴다고 머리를 질끈 싸매고 있는 건, 도대체 이과수 폭포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휴가를 재밌고 고생스럽게 다녀온 후, 회림이와 카톡을 했다. 한번 써보란다. 별 이야기 없어도, 소설도 좀 가미하고 상금도 300백만원인데 밑져야 본전 아니겠냐며.  

 

3. 그래 써주마. 없는 감동을 쥐어짜주겠다. 차디찬 이야기도 속 뜨거워지는 이야기로 바꾸어겠다. 하루동안 생각하면서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다 쓰고나서 보니 따뜻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보려고, 괜히 우리 엄마아빠만 많이 등장시켰다. 아무리 개똥같이 쓰더라도 읽는 사람 모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소재아니겠는가. 엄마, 그리고 아빠.

 

4. 글의 중심 소재는 눈물. 눈물도 그냥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니고 눈동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눈물. 눈에 '성에'가 끼어서 세상이 뿌옇게 흐려보이는 재미있는 상태이다. 임팩트 있는 시는 항상 하나의 소재를 중심으로 풍성하게 시상을 발전시켜 나간다. 산문이지만 나도 한번 따라해보고 싶었다. 안구에 습기차는 그 상태를 기준으로 과거로도 현재로도 미래로도 슝슝 달려보는 거지. 그러고보니 봉사활동 내용은 전혀 없는 것 같다. 전부 내 이야기네 뿐이다.

 

5. <경고> 공모전에 참여하기 위해 쓴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착한 자세로 감동을 쥐어 짜냈다. 견딜 수 있는 자는 읽어도 좋다. 비록 닭살돋고 가증스럽더라도 참아주길 바란다. 그렇지 못하겠다면 과감하게 스킵하시길!

 

6. 다음은 '해외봉사활동 체험수기 공모전'에 올린 글 전문이다.  

 

<Fade in, Fade out.>

  “축하해요, 많이 사랑하고 오세요.”

  2012년 2월, KOICA 협력요원으로 거취가 확정되고 논산훈련소에 입소하기 전 받은 문자 메시지의 내용이다. 참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사랑하고 오라니. 아무리 봉사단원이라고 해도 나는 일을 하러 가는 것이지 그들을 사랑해주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협력요원 파견도 그다지 축하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군 대체복무가 아니었다면, 나란 놈은 절대로 KOICA 봉사자로서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으리라.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일과 공부만을 중시하는 사람. 냉철한 이성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사람. 사람보다는 일의 성과에 더 큰 가치를 두는 차디찬 마음의 소유자. 시크한 서울 남자...

 

  그래서인지 최근 3년 동안 속 시원하게 울어본 적이 없다. 물론 눈물이 글썽글썽해서 눈앞이 흐려진 경우는 2번 있었다. 아빠 덕분에 한번, 엄마 덕분에 한번. 약 2년 전, 임용고사 1차 시험을 치를 때였다. 시험 당일 하루 전에 아버지는 내 수험표를 들고 시험 장소에 다녀오셨다. 명목은 나에게 길을 알려주겠다는 것.

  그리고 내가 시험 당일 지하철을 타고, 출구에서부터 고사장까지 걸어가는데 괜스레 세상이 뿌옇게 변하는 것이었다. ‘어제 아버지가 걸어갔던 길을 오늘 내가 똑같이 걸어가는구나.’ 생각하니 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와 울컥한 것이다. 그 덕분인지 1차 시험을 잘 보지는 못했다.

  엄마는 내가 봉사단원 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파라과이로 출국할 때, 공항에서 눈물을 펑펑 쏟아내셨다. 엄마 앞에서는 당당하게 출국했다. 하지만 비행기에 혼자 앉아 있게 되자 눈 속에 눈물이 꽉 차버렸고, 작은 내 눈은 왕눈이 눈알이 되어버렸다.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고 눈 속에 보관하려고, 그리고 동기단원들에게 울보로 발견되지 않으려고 그야말로 발버둥 쳤다.

  그렇다. 시크한 도시 남자인 나의 눈물샘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은 엄마아빠 찬스만이 유일했다. 그렇다고 엉엉 울어버릴 용기는 없었다. 안구에 눈물이 차올라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정도. 추운겨울 버스 안의 유리창처럼 눈에 ‘성에’가 끼어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려지는 정도가 내 감정의 최고조였다.

 

  성에는 외부온도와 내부온도의 ‘차이’ 때문에 수증기가 승화하여 발생한다. 이를테면, 추운 겨울의 바깥 온도와 따뜻한 가정집의 온도 ‘차이’ 때문에 창문에 성에가 끼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서 얼마나 차갑게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사회의 온도와는 꼭 잘 맞았던 것 같다. 특별히 엄마아빠가 예기치 않게 내 가슴을 더웁게 하지 않는 이상, 내 눈에는 좀처럼 성에가 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곳 파라과이는 한국보다 더 따뜻하고 정겨운 나라임이 분명하다. 자꾸만 굵직한 눈물방울들이 눈에 맺히기 때문이다. 시크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이곳에 대충 자리 잡고 살아가려는데, 파라과이 친구들은 날 가만히 두지 않고 그 덥디 더운 기운을 내보내 내 눈알 표면에서 승화시켜버린다.

 

  나는 파라과이 Mariscal Estigrribia 지역의 한 인디오 초등학교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 이 곳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카메라를 좀처럼 다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나 같은 문화적 촌놈이 언제 카메라를 배워보겠나 생각해서 DSLR 카메라를 하나 구입해 온 것이 주요하였다.

  나는 덩치 큰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역 내 최고 사진사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덕분에 지역 내 모든 행사에 초청받게 되었고,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판매하는 ‘사진판매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수익금으로 학교에 요긴한 것들을 구입하는 맛이 아주 쏠쏠하다. 때때로 사람들은 초보 사진사인 나에게 사진을 부탁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한다.

판매사업

  그런데 요즘에는 가끔 사람들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찍게 된다. 아마도 박순철 화백의 ‘비는 내리고...’를 인상 깊게 보고 난 이후부터인 것 같다. 박순철 화백은 장대비 속에서 가냘픈 우산을 쓴 중년의 남자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그렸다. 웅크린 등, 휜 다리, 왼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 뒷모습은 나에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 꾸부정한 뒷모습의 자세는 내가 사랑하는 한 남자의 그것과 꼭 닮았기 때문이었다.

박순철, <비는 내리고...>, 176*140cm, 한지에 수묵담채, 1997

  내 뒷모습 사진의 베스트 샷 주인공은 단연 Zulma(술마) 선생님이다. 엄마 같은 분이다. 내가 스페인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항상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때론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사진 속 선생님의 뒷모습에는 양 어깨 위로 뭔가 묵직한 것을 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엄마의 이미지를 더욱 상기시킨다.

Zulma 선생님. 뒷 모습의 양 어깨가 묵직하다.

  실제로 술마 선생님은 자녀가 10명이나 된다. 별명이 ‘madre(어머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출근하였다. 유심히 살펴보니 오른쪽 발목이 살짝 부어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때, 특별하게 다치지는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아 선생님의 무거운 몸을 발목이 온전히 지탱해내기가 힘들어 말썽을 부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품에 안겨있는 아직 두 살도 못된 막내딸도 한 몫을 했을 터이었다.

 

  다음날 코이카 구급약품함에서 소염제 하나를 챙겨서 학교로 출근하였다. 별 것 아니지만 이건 대단히 결의에 찬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학교 선생님들은 항상 나에게 무언가 받기만을 원했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에게는 사적으로 아무 것도 주지 않겠다고 결심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예쁜 분홍색 스포츠 타울을 사용하고 있으면, 이를 보고 어떤 선생님은 ‘2년 후에 너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 수건은 나에게 줘야해.’라고 당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이들을 도와주러 왔다지만, 받기만 하는 거지근성에 편승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술마 선생님은 출근하지 못했다. 발이 심하게 부어올라 걷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선생님의 집으로 찾아갔다. 왜 도대체 병원에 가지 않느냐는 타박 아닌 타박과 함께 선생님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부운 발목에 약을 하얗게 바르고 문지르기 시작하는데 뜬금없이 내 눈시울이 조금 뜨거워지는 것이 아닌가?

  현지인들을 거지 취급하는 좁은 마음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프면서도 ‘안 아파. 병원 갈 필요 없어.’ 하는 엄마에 대한 짜증이 확 묻어 나와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눈망울에 낀 성에가 뭉쳐뭉쳐 방울이 되어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집에서 나왔다.

 

  사진을 찍어주다 보니 학교의 공적행사뿐만 아니라 동료 선생님들의 개인적인 일에도 사진촬영을 부탁받게 된다. 지난 주 금요일,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 집 문을 두드렸다. 부스스한 차림으로 나가보니 마리(Mari) 선생님이었다. 부탁인즉, 잠시 후에 아들이 고등학년 졸업을 하는데 사진을 좀 찍어달라는 것.

  이른 아침인지라 조금 짜증이 났지만, 부탁하기에 씻지도 않고 카메라를 들쳐 메고 나갔다. 아들의 이름은 도밍고(Domingo). 나는 생각을 비꼬았다. ‘얼마나 잘난 아들이면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사진 찍으라는 거야! 이름은 참 희한하네. 일요일에 태어났나?’(Domingo는 스페인어로 ‘일요일’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친구는 최우수졸업자(mejor alumno) 상을 비롯하여 졸업자 대표로 4개의 상을 연거푸 수상했다.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도밍고 엄마로서 마리선생님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아들의 모습을 꼭 사진 속에 남기고 싶었으리라. 도밍고는 졸업자를 대표해서 연설을 시작했다. 아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표하면서, 어머니 마리를 잊지 않고 언급했다.

  ‘나의 친밀한 친구이자, 강력한 후원자이신 어머니에게 감사함을 표합니다.’ 아들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나의 카메라도 바쁘게 움직이며 아들 한 번, 어머니 한 번씩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함과 감사함으로 울고 있었고, 나의 카메라에도 갑작스럽게 더운 기운이 올라왔는지 렌즈 속 세상이 흐릿해져 좀처럼 사진을 잘 찍을 수가 없었다.

Domingo. 졸업 대표자로 발표하며 울음을 삼킨다.

  글을 쓰며 봉사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봉사란 구체적인 일을 하는 것보다, 봉사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하게 되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남은 파라과이 생활을 통해서 뜨거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한국으로 돌아갈 때에는 내 눈이 아닌 현지인 친구들의 눈시울을 촉촉하게 적셔줄 정도로 말이다.

수도에서 내려오는 버스에서 파라과이의 푸른 초원을 바라본다. 그리고 초원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크디 큰 엄마아빠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흐려진다. 또 한 번 나타났다가 흐려진다. Fade in, Fade out.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