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첫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2013. 1. 8. 10:36KOICA 해외봉사활동/성인문해교육 (TESAPE'A)

1.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아, 이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치지?’라는 고민을 시작했거든요. 2주 넘도록 수도 아순시온에서 아무 생각 없이 탱자탱자 놀아버린 결과입니다. 아침밥 먹고 집중해서 교육내용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2.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기 위해서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학생들은 발음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내가 스페인어 발음을 하면 학생들은 내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따라 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아, 발음과 철자의 '상관성', '규칙성'을 보여주어야겠구나!

 

3. 한 주간의 교육내용은 간단합니다. 스페인어의 음절을 이해하고 발음해보기, 그리고 이중자음을 배우고 알파벳 외우기, 자신의 이름을 써보기...... 그리고 다음주부터는 간단한 회화 문장을 프린트하여 나눠주고 함께 음독해나가려고 합니다. 일단 회화문장이 아니면 제가 해석이 불가능하거든요. -_-

 

4. 먼저 스페인어의 5개의 모음 ‘a(아), e(에), i(이), o(오), u(우)'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5개의 모음들이 자음과 결합하여 최대한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음절그룹들을 제시합니다. 불규칙한 것들은 천천히 제시하려구요. 복잡하면 미안하잖아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모음: a(agua), e(escuela), i(iglesia), o(ojo), u(uva)

h: ha(hambre), he(hermano), hi(hielo),  ho(hombre), hu(huevo)

b: ba(bandera), be(beso), bi(bicicleta), bo(borracho), bu(buenos aires)

c: 모음과의 결합되었을 때, 발음이 불규칙적이기 때문에 다음 기회에!

d: da(david), de(despensa), di(discoteca), do(domingo), du(ducha)

......

 

5. 그냥 음절만 공부하면 심심해서 그 음절로 시작하는 단어도 찾아서 리듬에 맞춰서 같이 읽어보았습니다. 아! 아구아!, 에! 에스꾸엘라!, 이! 이글레시아! 이런식으로요 :) 영어로 예를 들면 a는 apple, b는 bear 뭐 이런 식인데, 이건 생각해보니 알파벳으로 연결되는 거네요.

 

6. 수업은 6시 30분 시작이었습니다. 5시쯤에 도착해서 교실 상황 좀 보려고 했습니다. 이틀 전에 함께 교실 정리하고 책걸상 나르기로 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거든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사태를 수습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역시 일을 부탁하면서 뇌물로 찔러넣었던 pulp(현지 탄산음료) 4L가 아주 효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상과 걸상, 분필, 잘 깍여진 연필들... 너무 깨끗하고 잘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7. 처음 수업인데 분위기 좀 썰렁할까봐 얼른 슈퍼가서 빵하고 음료를 좀 사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오자 마자 그냥 먹기 시작했습니다.

‘Despues comer estos, nosotros estudiamos.' 일단 먹고 공부하자!

사람들이 씩. 웃어줍니다. 함께 먹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저는 이들이 충분히 존중받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 스튜어디스 놀이를 좀 했지요. 마냥 돌아다니면서 빵도 저자세로 두 손으로 드리고, 음료수도 따라주고 다 마시면 또 따라주었습니다.

공부도 식후경.

 

8. 16명이나 왔습니다. 등록했던 사람들 중에 3명이 오지 않았지만, 4명의 어머니들이 막가파로 찾아오셔서 제 학생이 되었습니다. 파라과이 사람들 말로만 항상 참여한다고 하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감사했습니다.

 

9.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자기소개를 하고 오리엔테이션을 했습니다. 나는 누구이고, 이 프로젝트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쿠폰은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등등.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Soy extranjero. Hace solo 6 meses nomas en chaco y aca paraguay enseñame castellano. Por eso yo no tampoco estoy bien en castellano. Yo no estoy aca enseñar ustedes, quiero aprender juntos...... (나는 외국인입니다. 이 곳에서 생활한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파라과이는 나에게 스페인어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당신들처럼 스페인어 잘 못합니다. 나는 여기에 당신들을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함께 공부하고 싶습니다)

뭐 이딴 식으로 말했던 것 같습니다. 몇몇 학생들의 얼굴이 아래로 조금 움직였다가 위로 곧장 올라옵니다. 아, 잘 말했구나 싶었습니다.

 

10. 첫 주의 수업 컨셉은 ‘입으로 크게 따라하기’입니다. 쓸 필요도 기억할 필요도 없다. 크게만 따라 읽어달라고 했는데, 거참... 잘 안 읽더라고요. 헤죽헤죽 웃기만 해서 애 좀 먹었습니다. 앞으로도 꽤 애 먹을 것 같고요. 중간중간에 하는 농담은 아주 잘 먹혀서 좋았습니다.

 

11. 농담은 아주 유치해요. 'ha(아)' 음절을 가르치고 ‘hambre(배고프다)’ 단어를 같이 말한 후, 'tengo hambre!(배고파요!)‘ 라고 말하면 이 사람들... 그냥 푸하하 웃습니다. 'be(베)’ 음절을 가르치고 ‘beso(뽀뽀)’ 단어를 같이 외쳐본 후, ‘A mi no me gusta beso!(나 뽀뽀 싫어!)’ 라고 말하면 빵빵 터집니다.

 

12. 처음에는 말도 잘 못하니 괜히 일 벌였다고 큰일이다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너무너무 재밌었습니다. 역시 대한민국 선생이라, 칠판 앞에서 색깔 다른 분필 3개를 손가락 사이에 껴 넣었을 때에 나오는 자신감이란...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으로 칠판에 교육내용을 구조화해서 판서질을 할 때는 그야말로 정말 신납니다.

 

13. 한참 가르치고, 잘 안 따라하는 사람들 눈치 주면서 소리 지르고 있는데 눈을 어디다 둘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꾸 수업 중에 이 사람들 아이들에게 젖을 줍니다. 그냥 처음에는 골 때리다고 생각했는데, 그다음엔 재밌고, 그다음엔 참 좋습니다. :)

 

14. 매일 뒷자리에서 가장 크게 따라하는 가장 나이 많으신 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시간을 착각해서 1시간 30분 수업인데, 1시간 정도 수업하고 끝나버렸습니다. 그래도 긴장했는지, 시간을 조금 착각했네요. 내일부터는 쉬는 시간까지 도입해서 빡빡하게 다 채우렵니다. 다 죽었어! :)

 

15. 내일부터 더 열심히 해야겠습니다.

 

16. 감사하게도 너무 재밌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