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공부는 기술입니다. 다섯번째 수업!

2013. 1. 15. 12:23KOICA 해외봉사활동/성인문해교육 (TESAPE'A)

0. 오늘은 기쁨으로 블로깅을 합니다. 매월 말에 항상 인터넷이 안됩니다. 집주인이 인터넷비를 도대체 한번을 제 때에 내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포스가 달랐습니다. 수도 아순시온에서 돌아오고 나서 보니 인터넷이 끊긴 상태로 이놈의 집주인이 휴가를 떠났지 뭡니까? 오늘 집주인이 돌아오고, 저는 세상과 다시 연결되어 예기치 못한 기쁨을 누립니다.

 

1. 오늘 다섯 번째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저번 주까지 스페인어의 모음 ‘a, e, i, o, u'에 자음을 이것저것 붙여보고 발음해보는 연습을 했습니다. 철자의 규칙성을 파악했지요. 확실히 예전보다는 잘 따라합니다. 이번에 수업에 등록한 아줌마 학생들은 총 20명이지만 지금은 정예 멤버 12명 정도만 남았거든요. ㅠㅠ

 

2. 수업은 정말로 재밌습니다. 수업을 하면서 나름 포스 넘치는 대한민국 사교육 강사로 변신하기도 합니다. 저는 큰 소리로, 그들은 작은 소리로...... ‘a, e, i, o, u'를 외치다보면, ‘와 진짜,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지?’라는 생각이 저절로 나면서 스스로 미소 짓곤 합니다. :)

 

3. 수업은 잘 진행되었지만, 그동안 쪼금 골치가 아팠습니다. 2달 동안 꾸준히 공부하자고 제가 발행한 쿠폰 때문입니다. 저는 분명히 despensa(마을가정상점) 5곳과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제 쿠폰 받아주기로요. 그런데 제 프로젝트를 도와주는 선생님이 그러는데, 학생들의 쿠폰을 안 받아준다는 겁니다.

 

4. ‘이게 뭐람, 상점 주인들 니들은 다 죽었어.’ 하면서 다음날 아침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상점 주인들 말은 또 다릅니다. ‘아무도 너 쿠폰 가지고 안 왔어’, ‘학생들이 너의 아이디어를 잘 이해 못했나보다’ 등등... 그리고 심지어 이미 제 쿠폰을 가지고 있는 상점 한 곳도 있었습니다.

 

5. 이게 뭐지... 학생들이 진짜 이해를 못한 건가. 저, 리디아 선생님(제 프로젝트를 도와주시는 선생님), 학생들끼리 삼자대면을 해봐도 이게 잘 해결이 안 됩니다. 문제가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저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상점에서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설마 쿠폰의 아이디어를 아직까지도 이해 못하지는 않았을 테고...

 

6. 그리고 오늘 드디어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냥 다 무시하고 학생들 편에 서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통역이라는 걸 받아봤습니다. 학생들은 저에게 절대로 스페인어 사용을 안합니다. 제 스페인어는 나름 잘 알아듣는데, 말은 그들의 니바끌레어만 사용하거든요. 직접적인 소통이 없으니, 이거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7. ustdes me dicen que las despensas no quieren aceptar mis cuponcitos. por eso yo hable con los dueños. y ellos me dicen que nadie vino... podria traducirme a ellas? (여러분들은 가정상점들에서 제 쿠폰을 안받아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해보았는데 그들은 아무도 여러분들이 쿠폰을 들고 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통역 좀 해주세요.)

dalkjfdalkjfldfjd;lkerirqweok...... (가끔은 불어로도 들리는 니바끌레로 어이없다는 듯이 학생들끼리 말합니다.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은 아니더군요. 선생님의 통역을 통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들이 쿠폰을 보고 웃었다고 말했습니다. 고얀 놈들 같으니라고.)

Bueno. lo que siente respecto es muy importante para mi. y para ustedes tambien. entonces de que despensa acepto mi cupon? de que despensa pueden usar sin verguenza? podria traducirme tambien? (이런, 존중받는 느낌은 나에게 엄청 중요해요. 그리고 여러분들에게도 마찬가지에요. 그럼 어떤 가정상점이 쿠폰 받아주던가요? 창피함 없이 쿠폰 사용할 수 있는 데스펜사는 어디인가요? 통역 해주세요 쌤)

dlkafdoiqrlkmcnmvzqeeqo...... (다시 한번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데스펜사 5곳중 한곳을 말해주었습니다.)

bueno. entonces para sacar sus verguenza, mañana vamos a ir juntos despues de la clase comigo. esta bien? (좋아요. 그럼 창피함을 없애기 위해서 내일 다같이 쿠폰 사용하러 갑시다. 저랑 같이 가요. 괜찮아요?)

 

8. 도저히 이해가 안갑니다. 그 누구도 손해보지 않고, 저만 손해보는 협상인데도 이렇게 삐그덕 삐그덕대다니, 진짜 이해가 안갑니다.

 

9. 어쨌든 결정했습니다. 마을 전체와 거래하는 것을 포기하고 학생들에게 막말로 쪽팔림 안주고 쿠폰 잘 받아주는 한 곳과만 거래하기로 했습니다. 저랑 같이 우루루 떼로 몰려가서 쿠폰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수업을 통해서 존중받는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이놈의 고약한 데스펜사 주인들이 정반대로 행동한 것 같습니다. 정말 사실인지는 더 알아봐야겠지만, 이미 편들기의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에고, 저는 그래도 제 학생들 편에 슬랍니다.

 

10. 이 일을 통해서 앞으로 말 잘하는 사람보다는, 꼭 통역을 받는 사람이 되야겠단 생각을 했습니다. 영어 공부, 스페인어 공부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좀 더 내공있고 포스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희망 말입니다. 영어를, 스페인어를 잘 못말해도... 뭔가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영향력이 정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1. 오늘은 파일을 구입해서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으로 지금까지 공부한 자음, 모음 결합을 프린트해서 나눠주고 파일에 껴서 차곡차곡 모아 교재처럼 만드려는 저의 낮은 수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놀랍게도 아줌마 학생들이, 파일에 종이 끼는 방법을 모르더군요... 하나하나 번거롭게 끼어주었지만, 좋았습니다. 그들이 받는 학생대접을 조금은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학습내용을 정리한 유인물과 파일을 받을때마다 자기들끼리 자기들의 언어로 키득키득 웃으며 쑥덕쑥덕대는 걸 보니 말입니다.

<나의 첫번째 교재, 나름 내 공부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12. 그리고 정리된 유인물을 보고 빈 A4용지에 따라쓰기를 하도록 했습니다. 쓰기 전에 말해보고, 써보도록... 그러면 말하기, 읽기, 쓰기, 듣기가 다 되기 때문에 꼭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아씨... 아무도 그렇게 안하는 겁니다. 앞에서 충분히 알파벳 철자들 쓰는걸 보여줬는데도 인쇄된 유인물 보고도 눈을 찌푸린 채 따라 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쓰기 전에 입으로 말해보세요. 철자를 발음하는 법도 알아야 해요’ 말했더니... 아씨... 진짜 아무도 그렇게 안합니다. ㅠㅠ

<쓰기 전에 철자를 보고 말해보라고 했지만, 따라 쓰기에만 전념없다>

 

12. 공부는 일종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일에 종이를 끼워 넣는 작업도, 인쇄된 유인물을 보고 알파벳을 따라 써내는 일도 모두 기술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공부를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초 집중을 하고 하는 것이지요. 연습이 필요한 일입니다. 자꾸만 철자를 보고 말해보고, 따라 써내다 보면 결국엔 무조건 잘 될 일입니다. 그들은 저보다 우물에서 물을 잘 퍼냅니다. 그리고 기가 막히게 머리 위에 지고 갑니다. 그렇듯이 저는 그들보다 공부하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학생들 중에 젤 어리신분. 역시 젤 잘 따라 쓰심!>

<철자 보고 크게 따라 읽기는 절대 안하셨지만, 따라 쓰시는 것은 기똥차게 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