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힘들겠네요. 무슨 사연이라도?

2013. 11. 13. 11:18KOICA 해외봉사활동/상상하고, 추억하며 2013


1.


  지난 삼 일 동안 정말 더웠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었다. 파라과이 사는 동안 손에 꼽을만한 더위였다. 나는 내 몸을 집 안으로 더 깊숙이 숨겨야만 했다.

  하지만 어제였다. 새벽에 잠시 내린 소나기로 모든 게 신선해졌다. 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기분 좋게 산책을 나섰다. 집을 나와 병원 가는 길로 꺾어 들어가는데 나무그늘 밑에 어느 중년의 남자가 누워있었다. 나이는 잘 모르겠다.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중간쯤 되어 보였지만, 햇볕에 워낙 그을린 피부들이라 확실치가 않았다.

  아저씨는 거의 쓰러져있었지만, 경험상 크게 걱정할 거리는 아니었다. 아파서 누워있는 응급상황이 아니다. 술에 취해서 잠시 쭉 ‘뻗었을’ 뿐이다. 이곳에서는 대낮부터 술에 취해 사람들의 발밑을 침대삼아 생활하는 사람들을 보라쵸borracho 즉, 술주정뱅이라고 부른다.

  

  보라쵸 아저씨를 몰래 흘겨보며 나는 생각했다.

  ‘삶이 얼마나 고달플까? 정말 만만치 않겠다.’


  이전에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그들을 무능력한 실패자라고 생각했다. 굳이 모든 결과의 책임을 개인에게 뒤집어씌울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의 자기 삶도 통제하지 못하는 건 한심하고 창피한 일일 뿐이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저,

  ‘아, 정말 힘들겠다.’

  ‘어떤 깊은 사연이라도?’

  ‘처자식은 있나?’ ......

  이렇게 생각하고 만다.


  쓰러져 있는 아저씨를 직접 일으켜 세우고 “괜찮아요?” 말 건넬 용기는 아직 없다. ‘내가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헌신적인 고민도 없다. 그냥 쯧쯧, 이런 변변치 못한 것들, 하며 욕하지 않는다. 아저씨가 정말 힘들겠다. 딱한 사정이 있나보다, 생각할 뿐이다.



2. 


  오늘 학교에서 아멜리야Amelia선생님이 도움을 요청했다. 학교행사용 고기carne를 집으로 운반해달라는 것. 고기가 한 대야에 가득 찰 정도였다. 냉장고에 보관해둘 목적인듯 했다. 거부할 수 없었다. 다들 나보다 등치들도 크고 기력도 좋지만, 마음만은 고운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은 아가씨señoriata들이다.) 나는 힘없지만 남자로서 선뜻 길을 나섰다.


  아멜리야는 학교 코앞에 살고 있었다. 얼마 전에 이사를 했는데, 친오빠가 죽고 혼자 살게 된 아버지를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집은 좋았다. 앞마당에 조그만 나무들이 심겨져 있었다. 오랫동안 이 동네에서 살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집 앞마당에 각종 식물을 심어둔 집은 꽤나 잘나가는 집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있을 확률이 높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가족들이 집을 규모 있게 잘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기를 잘 운반해주었다. 물론 무거워서 힘들다고 몇 번이나 쪼그리고 앉아 있긴 했다. 아멜리야가 아버지를 소개시켜준다고 했다. 집 자체는 훌륭했지만, 아버지가 계시다고 나를 데려간 곳은 조그마한 창고 같았다.

  왠지 모르게 무섭다고 생각했다. 아멜리야의 나이만 어림짐작해 봐도 마흔 다섯 정도는 될 것이다. 언니들인 파티마와 레오나는 쉰을 넘었을 것이고. 조금 망설였다. 인상이 고약한 인디헤나 할아버지가 날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지, 집안의 좋은 곳 다 내버려두고 허름한 창고같은 곳에서 살고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면서.


  문이 열렸다. 생각보다 점잖고, 상상했던 것보다 깨끗하고, 어림짐작했던 것보다 젊고 후덕해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자리에 앉아 계셨다. 아멜리야는 나를 한국인Coreano로 소개했다. 악수를 하고 인사를 했는데, 뭔가 이상했다.

  할아버지는 시력을 잃은 것이다! 그래서 그냥 조그만 장소에 홀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이 다 원망스럽고,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참 힘들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여유만만하게 내가 이제 앞을 볼 수가 없어, 하며 허허 웃었다. 느껴지는 안정감, 이게 ‘살아옴’의 내공인가. 덕분에 “아멜리야가 날 너무 괴롭혀서 도대체가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냥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요.” 하는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함께 웃었다. 그리고 언제 한번 놀러오겠다며, 두 손을 꼭 잡고 작별인사를 나눴다.



3.


  슈퍼에서 라껠Raquel 선생님을 만났다. 그녀는 나를 힘들게 찾아다녔다며, 혹시 돈을 좀 빌릴 수 없겠냐고 물었다. 무려 10만과라니. 수도 아순시온에서 모임이 있는데 당장 차비가 없다, 돌아오자마자 갚겠으니 빌려 달라, 하지만 내가 돈 빌린 사실은 비밀이다, 너와 나만 아는 극비사실이다, 했다. 나는 지금은 돈이 없으니, 집으로 찾아오면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녀가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는 먼저 우리 집에 들러서 오랫동안 대문을 두드렸다고 했다. 내가 집에 없는 걸 확인하자, 마을의 슈퍼를 돌아다닌 것이다. 대단한 여자. 그냥 초록색 지폐 한 장을 건네주기가 좀 어색해서, 냉장실을 열어 초코파이 두 개를 꺼냈다. 하나만 꺼내서 줄까 하다가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인 사이디Saydy도 번뜩 생각이 났던 것이다.


  “하나는 너 먹고, 하나는 사이디Saydy 줘.”

  “고마워. 그런데 다마리스Damaris는?”

  “......” 냉장실에서 초코파이를 하나 더 꺼냈다.


  라껠은 그렇게 초코파이 3개를 챙기고, 오늘 일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라며 내 입단속을 다시 한번 단단히 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 마음은 다 똑같다. 차비가 없어 급하게 돈을 빌려야 하는 졸속한 상황이든, 아이들 아버지가 모두 다른 애매한 가정상황이든, 그 아버지들이 한 맘으로 단결하여 모두가 집을 가출한 절망적인 상황이든지 간에, 참 힘들어도 자녀를 생각하는 어머니 마음은 모두가 한결같다.

  그나저나 초코파이가 하나 남았다. 뭐, 초코파이는 정精이니까. 


사이디(왼), 다마리스(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