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밑이 어둡다

2013. 12. 16. 07:11KOICA 해외봉사활동/상상하고, 추억하며 2013

  어제는 아주 고약한 일이 있었다. 


  얼마 후에 있을 여행을 위해 돈을 좀 아껴보겠다고 깜빡깜빡하는 전등을 교체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속에서 계속 앉아 있었더니 며칠 동안 눈이 피곤했다. 급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내가 만약에 전등을 새로 산다면, 그 놈이 반 년 이상은 훌륭하게 버텨줄까? 생각해보니 지금 나에게 빛을 선사해주는 저 놈도 일 년 정도 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집에 갈 때까지 내 눈이 찌뿌듯할 작정이 아니라면 될 수 있으면 빨리 새로운 전등으로 갈아 끼는 것이 현명했다.

  큰 발걸음으로 슈퍼에 갔다. 어떻게 잘 설명할 자신이 없으니 거미줄이 잔뜩 쳐진 방전된 전등과 동행했다. 현지어를 못해도 상관없다. ‘이거’라는 매직워드만 있으면 될 일이었다. ‘이거랑 똑같은 거 줘!’

  이런, 전등은 9,000과라니도 안했다. 전등 하나에 한 25,000과라니 할 줄 알고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자부심 가득했었는데, 그럴 거리도 안됐던 것이다. 그래서 무려 두 개나 질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 슈퍼에 수박이 열댓 개가 차분하게 앉아서 주인님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먹을 만한 과일이라곤 바나나밖에 팔지 않는 우리 동네 슈퍼에서 수박을 발견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수박을 좋아하는 나를 ‘수박박사’라고 불렀다. 그 수박박사는 그 연구대상들을 심오하게 관찰하며 손으로 무게를 어림잡아 보았다. 수박은 1 킬로그램당 2,000과라니, 그 수박박사는 적당한 무게의 수박을 고르기 위해서 그 곁을 맴돌았다.

  수박의 당도는 잘 모르겠고, 가장 적당한 무게의 둥글둥글한 놈으로 골랐다. 그런데 기다란 형광등 두 개와 수박을 한 번에 운반할 자신이 아무래도 없었다. ‘그래, 까짓것 두 번 왔다 갔다 하자. 그럼 나는 밝은 방 안에서 에어컨을 키고 시원한 수박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슈퍼와 우리 집을 두 번 왕복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더 현명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다.)


  수박배달을 마치기 위해서 나는 우리 집 현관문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았다. 그런데 내 열쇠 꾸러미가 가벼운 것이 뭔가 허전하게 느껴졌다. 파견학교의 도서관 열쇠 두 개가 없어진 것이었다. 원래 한국의 봉사자 따위에게는 신성한 학교의 열쇠를 허락해줄 수 없지만, 방학에는 홀로 학교 문을 열고 닫는 형편이기에 교장누나가 선심 쓰듯이 나에게 빌려준 소중한 열쇠였다.

  찾아야만 했다. 열쇠고리를 열쇠 꾸러미에 튼튼하게 잘 걸어두었는데 어떻게 도서관 열쇠 두 개만 딸랑 사라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찾아야만 했다. 열쇠를 찾기 위해 나는 오늘 이미 총 네 번 지나간 길을 향해 또 걸어가야만 했다. 도서관 열쇠 탐사를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경구를 나 스스로에게 주입시켰다. 바로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내가 찾고 있는 물건들은 언제나 내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열쇠를 찾아보시오-


  그래서 고개를 처박고 길을 걸어다니면서 내 시야를 너무 멀리 두지 않도록 주의했다. 나의 찢어진 작은 눈은 이런 일에 참 유리했다. 길바닥을 내 눈과 나란하게 잘게 썰어서 한 눈에 넣어두고 레이저빔을 쏘며 다녔다. 만약 내가 크고 동그란 눈을 가졌다면 그렇게 훌륭한 횡적 시야를 뽐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 눈에 감사했다. 각자의 집 마당에서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이 신기했는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뭐 찾아?”

  “응? 열쇠.”

  “열쇠고리랑 같이 잃어버렸어?”

  “아니, 그냥 열쇠만.”

  “그럼 힘들지.”


  대화는 항상 이렇게 진행되고 끝마쳤다. 하지만 나는 불굴의 의지로 집과 슈퍼사이를 두 번 다시 왕복하며 햇빛 받은 열쇠의 반짝거림을 포착하려고 애썼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바닷가의 모래알을 세어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게 보통일이 아닐 듯 했다. 밤하늘의 별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모를 일이지만, 여기서 밤하늘의 별을 세어 보겠다고 하는 건 내가 지난주에 담근 깍두기의 개수를 세는 것보다 분명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고개를 땅에 처박고 두 번을 집과 슈퍼 사이를 왔다 갔다 했지만, 허탕이었다. 혹시 내가 오늘 슈퍼를 다니며 열쇠를 흘린 것이 아니라, 어제쯤 나도 모르게 어디서 떨어뜨린 것은 아닐까, 하며 집 마당에 이르렀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속담의 의미를 충실하게 따르기 위해 나는 열쇠원정을 시작하기 전에 집 근처부터 샅샅이 수색했었다. 집 근처에 열쇠가 없음이 확실해지자 맘먹고 열쇠수사를 시작한 것인데,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찾아보자 하여 집 근처를 대충 훑어보았다. 그런데 아, 저기 열쇠 두 개가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 기뻐서 태권도 도장의 기합과 같은 짧고 높은 탄성이 터져 나왔지만, 아오, 이게 내가 한심하기도 하면서도, 억울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다행이다 싶다가도, 열이 받았다.


  속담은 진리였다.

  ‘눈 뜨고 코 베인다.’



끝.